기초과학자들 “졸속 추진 R&D 예산 삭감 ‘원점 재검토’ 촉구”
상태바
기초과학자들 “졸속 추진 R&D 예산 삭감 ‘원점 재검토’ 촉구”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9.27 02: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연구원 노조부터 학생, 교수까지 확산되는 "R&D 예산 삭감 반대"
- 기초과학 학회들 “편견과 졸속으로 추진된 R&D 예산 삭감 철회해야”
- 안철수 의원, '과학기술 예산 삭감'에 "문제 해결 없이 예산만 삭감, 더 큰 문제“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실이 25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한 ‘과학기술 연구 환경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토론회 모습 / 출처: 안철수 의원 페이스북

정부가 내년도 R&D(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대해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과학기술계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고 과학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연구자 약 10만 명이 지난 20일 정부 R&D정책에 우려를 표한 데 이어 순수 기초과학만을 연구하는 교수, 연구원, 학생연구원 등까지 집단 반발에 동참하는 상황이다.

과기노조, 공공연구노조 등 과학기술계 연구원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시작된 R&D 예산 삭감 반대 운동이 주요 이공계 대학 총학생회에 이어 이공계 교수들이 주로 소속된 학회와 협·단체로 퍼져나가고 있다. 지난 20일에는 국내 30개 기초과학 관련 학회가 모인 기초연구연합이 "내년도 기초연구사업 예산 삭감을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25일에는 기초과학 학회협의체(이하 ‘기과협’)가 '정부 R&D제도혁신 방안에 대한 기초과학계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지난달 발표된 정부의 대대적인 기초 R&D 삭감안이 포함된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은 편견과 졸속으로 마련된 정책으로 담대한 미래를 견인할 수 없다"며 '원점 재검토'를 촉구했다.

이번 성명에는 △대한수학회 △한국물리학회 △대한화학회 △한국우주과학회 △한국기상학회 △한국지구과학회 △한국지질과학협의회 △한국천문학회 △한국해양학회 △한국생물교육학회 △한국동물분류학회 △한국유전학회 △한국환경생물학회 △한국식물분류학회 △한국진화학회 △한국통계학회 △전국대학 기초과학연구소 연합회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등 18개 기초과학단체가 참여했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정부가 R&D 예산 삭감의 명분으로 내세운 '카르텔'과 '나눠먹기' 등 그릇된 관행과 관련해 구체적인 예시가 없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재정 운영 비효율성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부 스스로가 혁신을 하려는 노력 대신 과학기술 R&D, 특히 기초 연구에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과협은 이번 R&D 삭감안과 관련해 "‘자율과 창의로 만드는 담대한 미래’라는 국정목표 및 ‘R&D 예산을 정부 총지출의 5% 수준에서 유지’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앞서 과기정통부는 지난달 29일 내년도 국가 R&D예산으로 올해 대비 5조2000억 원(16.6%) 삭감한 25조9000억 원을 편성했다. 정부 총지출 대비 R&D예산은 3.94% 수준으로, 이 수치가 3%대로 떨어진 건 2005년 이후 19년 만이다. 최근 10년간(2013~2023) 정부 예산 총지출 대비 R&D예산 투자는 평균 4.83%를 기록했다.

기과협은 "정부 총지출이 증가했음에도 유독 R&D 예산만 큰 폭으로 삭감한 것은 재정 운영 비효율성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부 스스로가 혁신하려는 노력 대신 과학기술 R&D, 특히 기초 연구에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기과협은 "각고의 노력으로 쌓아온 과학기술 성과를 정부가 '쉽게 성공하는 R&D'와 '국내에 갇혀있는 R&D'라고 폄하하고, 일부 극소수 연구자의 부적절한 사례를 일반화해 모든 과학기술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번 발표는 정부와 과학기술계 사이의 신뢰와 과학기술인의 자부심에 큰 타격을 주었다"며 "예산 삭감의 최대 피해자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Post-Doc) 등 학문후속세대라는 점은 또다시 과학기술인의 위상 추락으로 인한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과학기술 패권 경쟁에서 인재 양성만이 유일한 희망인 대한민국에게는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교육과 연구와 관련된 정책은 오랜 숙의를 거친, 예측 가능한 제도 운영이 중요하다"며 "졸속으로 만들어진 정부의 R&D제도 혁신의 기본철학과 전략으로는 장기적인 국가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과협은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졸속으로 추진된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과 국가 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 조정을 원점에서 재고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과학기술인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진정성 있는 비전과 실질적인 육성 전략의 제시 △오랜 기간 지속적인 노력으로 구축된 건전한 연구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일방적인 연구지원체계의 변경 지양 △소수의 의견이 아니라 상식 있는 모든 과학기술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 의견을 담아 정책 입안 과정에 반영 등을 요구했다.

 

 

■ ‘과학기술 연구 환경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토론회 … PBS 제도 개선 및 R&D 예산 삭감의 문제점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실과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연총)는 25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과학기술 연구 환경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노환진 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교수와 권성훈 국회 입법조사관, 문성모 한국재료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발표자로 나섰다.

▶ 노 전 교수는 30년 가까이 변하지 않는 정부의 R&D 정책을 지적했다. 1996년 도입된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연구자와 대학, 연구기관이 경쟁을 통해 연구 과제를 수주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연구 비효율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모든 연구자를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게 아니라 대학과 출연연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 전 교수는 “과학자들은 연구기관이 일차원적으로 경쟁하게 만드는 PBS를 계속 반대해왔지만, 3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며 “선진국들은 대학과 출연연, 국책연구소의 역할을 정해서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야 할 연구와 장기적인 연구를 나누는 데 한국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선진국은 연구에 정부가 간섭하지 말라는 정책원칙이 있고, 과학기술은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유연하게 운영해야 하고 우수한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며 “하지만 정부는 유연한 관리를 방만한 관리로, 우수한 사람에게 연구비 주는 것을 나눠 먹기로, 동료평가를 담합으로 규정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국가가 성장을 못한다”고 강조했다.

 

▶ 문성모 한국재료연구원 책임연구원도 세계적 수준의 연구성과가 나오기 위해선 최적의 연구환경이 먼저라고 지적했다. 문 책임연구원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선 ‘독성 리더십’이 없어져야 한다”며 “권력 남용과 소통 부재, 공감 부족, 갈등적 환경 야기와 같은 독성 리더십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PBS로 연구성과 경쟁보다는 수주 경쟁만 일어나 성공률이 높은 연구만 찾게 되고 정부가 간섭해 자율성마저도 부족하다”며 “R&D는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만큼 하위 20% 연구 구조조정보다는 상위 연구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 토론회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학원과 학부를 대표해 학생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이공계 우수인력 양성 정책과 처우 개선 문제를 제기했다.

이동헌 KAIST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지만, 현재 이공계는 박사학위 과잉과 노동시장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며 “현재 R&D 예산안으로는 이공계 최우수 인재 양성 정책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정현 KAIST 학부 부총학생회장은 “현재 정부의 정책 소통은 통보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과학기술인 정책을 하면서 소통은 필수불가결이고, 처우 개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미래 세대는 과학자가 되기를 희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전문기자는 “효율적인 R&D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다가올 위기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며 “기초연구가 많이 삭감되면서 연구자들의 좌절감이 큰데 국회가 공을 받아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토론회를 개최한 안철수 의원은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큰 패러다임의 변화는 미국과 중국의 과학기술 패권 전쟁이고, 한국의 생존전략은 남들이 쫓아오지 못하는 과학기술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라며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인 만큼, R&D 예산 자체를 줄이는 것보다 예산을 사용하고 감독한 정부의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과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출처: 안철수 의원 페이스북

■ 출연(연)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 … 삭감된 과학기술 연구비 원상복구와 연구비제도 개선 촉구

한편 이날 오후 국회에서 안철수 의원과 함께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연 정부출연연구기관 과학기술인협의회 총연합회는 삭감된 과학기술 연구비의 원상복구와 연구비 제도개선을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은 지난 50여 년간 나로호·한국형 원자로·TDX 등 국가적 신기술 개발을 통해 대한민국이 세계적 과학기술 강국으로 발전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며 "과거 출연연이 성공적 역할을 한 배경에는 연구원에 대한 우대정책과 자율성,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정부의 과학기술 예산 삭감 배경에는 정부가 1996년 도입된 과제중심제도(PBS·Project Based System)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은 "연구자는 성공가능한 단기적 과제위주로 제안해 연구비를 수주하다 보니 대한민국 연구과제 성공률이 99%에 달하는 기형적 제도가 되었고 과학기술연구자들은 생계형 보따리 장사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파생된 상황은 개선하지 않고, 연구원들을 갈라먹기·나눠먹기 연구비 카르텔집단이라고 지칭하며 사기를 저하시켰다"며 "더욱이 충분한 의견 수렴과 대안 없이 출연연의 R&D 예산을 삭감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미래를 삭감하는 우를 범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4차 산업시대에서 대한민국 번영을 위해선 "정권과 관계없이 경쟁력 있는 과학기술 진행과 육성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며 "대한민국의 과학 기술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만큼, 세계적인 과학기술을 선도하고 노벨상이 나오기 위해선 연구의 지속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자율적 연구 환경 조정을 위해 4가지 방안을 정부에 요구했다. 구체적으로 △출연연의 정부출연금 삭감안 철회 및 PBS 제도 개선 △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한 출연연 관리·통제 정책 폐지 △과학기술자 처우개선 및 연구결과 성과보상 제도 실시 △도전적 R&D 추진을 위한 연구과제 평가시스템 개선 등이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과학기술 연구환경 개선을 위한 제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출처: 안철수 의원 페이스북

■ 안철수 의원 “정부 과학기술 정책, 과거 틀 못 벗어나 … 제도·구조 문제 개선 않고 예산 삭감”

안철수 의원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은 선진국 수준으로 발돋움해 패스트 팔로우(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전환되었으나,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은 과거 패스트 팔로우 시절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 의원은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과 만나 "정부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예산을 삭감했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어떤 문제인지 말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과학기술 예산만 줄인다면,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며 "'과학기술 패권을 가진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이것이 전 세계적 패러다임이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있는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자 유일한 살길"이라고 강조했다.

안 의원은 대만의 반도체 위탁생산 회사인 TSMC를 언급, "미국은 과거 대만을 안보상 중요 국가로 생각하지 않았다"며 "그런데 TSMC 회사 나오면서, 대만은 절대로 뺏길 수 없는 나라로 변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것이 과학기술의 힘이고, 미국과 중국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능력을 보유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안 의원은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삭감 정책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윤석열 정부와 대한민국의 성공을 위한 충심에서 말하는 것"이라며 "저는 누구보다 정부가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대한민국과 국민이 모두 성공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