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걷기와 몸짓의 영상미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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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걷기와 몸짓의 영상미학적 가치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9.25 0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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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영화도시를 걷는 여성들 | 남승석 지음 | 갈무리 | 288쪽

 

서울, 홍콩, 타이베이, 베이징, 도쿄 등 국가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동아시아 다섯 개 도시를 전지현, 장만옥, 서기, 학뢰, 카라타 에리카 등 다섯 명의 여성 산책자가 걷는다. 이 책은 이 다섯 개 도시에서 제작된 다섯 편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 〈화양연화〉(2000), 〈밀레니엄 맘보〉(2001), 〈여름궁전〉(2006), 〈아사코〉(2018)를 통해 지구적 감성의 영화적 아틀라스를 재구성하고 아시아의 미 개념을 드러내고자 한다.

도시 공간에서 항상 중요한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떤 움직임이나 흐름과 관련된 모빌리티이다. 그러므로 도시에서의 걷기는 사회 활동으로서의 도시화이며 단순히 돌아다니는 행위 이상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배우가 도시를 횡단하며 산책할 때 영화도시라는 무빙 이미지가 생산된다. 특히 여성 산책자로서의 여성 배우는 영화도시에 대한 젠더화된 서사적 지도를 새롭게 그리는 존재이다. 이들이 수행하는 몸짓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지도일 뿐만 아니라 신화, 기억, 판타지, 욕망의 지도이기도 하다. 이 책이 주목한 여성 배우들은 한편으로는 ‘보여지는 이’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보는 이’로서 (무)의식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관찰자-주체’로 이해될 수 있다. 저자는 ‘피관찰자’이자 ‘관찰자-주체’라는 배우의 이 두 가지 특성이 상호 연관되어 펼쳐지는 동아시아 영화도시의 ‘수행적 풍경’을 탐색한다.

현대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지형은 격변을 거듭해 왔고, 이는 도시 공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엽기적인 그녀〉, 〈화양연화〉, 〈밀레니엄 맘보〉, 〈여름궁전〉, 〈아사코〉는 모두 2000년 이후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도 여성의 도시 산책, 이동, 걷기가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로맨스 장르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사건 직후에 제작되거나 최근의 재난 및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태적 재난을 명시적으로 혹은 스펙타클적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이 영화들의 서사에는 배경이 되는 도시나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상황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곽재용 감독의 2001년 작 〈엽기적인 그녀〉는 IMF 경제위기와 닷컴버블 직후에 제작되었다. 왕가위 감독의 2000년 작 〈화양연화〉는 홍콩 반환 이전의 러브스토리를 그리면서 반환 이후 홍콩의 불안정을 형상화하는 측면이 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2001년 작 〈밀레니엄 맘보〉는 대만의 부유하는 정체성 문제를 한 여성의 산책과 그 도시경관을 통해 그리고 있다. 로우 예 감독의 2006년 작 〈여름궁전〉은 천안문 사태를 배경으로 한 중국 청년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2018년 작 〈아사코〉는 동일본대지진 전후 일본 청년들의 정신적 균열에 집중한 작품이다.

2000년 이후 동아시아의 서울, 홍콩, 타이베이, 베이징, 도쿄 등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화려한 도시 이미지를 보여주는 외관 이면에서 압축적 근대화로 인한 개인들의 비극적인 트라우마가 축적된 상황을 드러낸다. ‘동아시아 영화도시’라는 개념은 여러 세대에 걸친 사람들이 거주하며 만들어 낸 사회와 개인의 상반되고 모순된 이중적 속성을 보여주는 반영체이다.

뉴 밀레니엄 이후의 동아시아 영화에서는 특히 여성 산책자가 두드러지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일본과 홍콩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 영화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영상문화 연구에서 인물의 몸짓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문화적 기억의 촉매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책은 ‘여성 산책자 그라디바’ 개념을 제출하며, 동아시아의 영화적 지도그리기 실천에서 그라디바 개념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면서 영화 속 여성 산책자들의 몸짓에 주목한다.

그라디바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망상(delusion)을 설명하기 위해 빌헬름 옌센의 소설 『그라디바』(1902)를 사례로 든 데서 유래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하놀트는 독특하게 걷고 있는 여인의 부조를 보고 그것을 ‘그라디바’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걷고 있는 여성’이다.

소설 『그라디바』는 1902년 『빈 신문』에 연재되었던 빌헬름 옌센(1837~1911)의 작품으로, 폼페이를 발굴하는 고고학자 노베르트 하놀트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친구였던 조에 베르트강의 걷는 모습에 매혹되지만, 그녀 자체는 잊어버리고 오직 그녀의 걸음걸이에만 애착을 보인다. 결국, 하놀트는 로마의 한 박물관에 전시된 걷고 있는 한 여성의 부조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그라디바는 하놀트가 잊어버린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귀환하는 억압된 것의 알레고리이다. 기존의 그라디바 연구는 정신분석학 연구와 알레고리 연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라디바는 많은 초현실주의, 미래주의자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1912)나, 보치오니의 〈공간에서 연속성의 한 형태〉(1913)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라디바를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 그리고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의인화된 시대적 알레고리로 간주하였다.

이 책은 그라디바를 여성 산책자에 대한 예술 철학적 연구로 확장하려 시도한다. 저자 남승석에 따르면 그라디바의 혁명적인 요소는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이다. 책에 따르면 그라디바의 매력은 자유로운 걸음걸이, 육체의 움직임, 특정한 목적을 향한 걸음걸이에 있다. 이 책은 ‘그라디바’ 개념을 토대로 영화와 영상문화에서 도시와 전원을 걷는 여성 캐릭터들을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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