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심적 시각으로 다시 읽는 페미니즘‘들’의 지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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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심적 시각으로 다시 읽는 페미니즘‘들’의 지구사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9.25 0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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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들: 여성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지구사 | 루시 딜랩 지음 | 송섬별 옮김 | 오월의봄 | 500쪽

 

그간 우리가 페미니즘 역사를 이해한 방식은 ‘물결’ 서사다. 19세기~20세기 중반 여성참정권운동을 중심으로 한 제1물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해방운동이 등장한 1960년대~1990년대 제2물결, 여성 내부의 불평등 문제를 더욱 활발히 제기하기 시작한 21세기 제3물결이라는 페미니즘 역사서술 방식은 페미니즘의 과거를 이해하는 기초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물결 서사는 페미니즘의 기원을 유럽과 미국이라는 서구사회에 둔다. 실제 역사에 따르면 페미니즘의 ‘기원’이라 할 만한 순간들, 인물들은 범세계적으로 존재했으며 그 흐름 역시 매우 다양했음에도. 가령, 물결 서사는 여성참정권과 같은 문제를 진작에 해결된 것처럼 이해하게 했지만,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의제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해 저자 루시 딜랩은 지구적 관점으로 페미니즘의 과거를 새롭게 안내한다. 이 책이 ‘세계사(world history)’가 아닌 ‘지구사(global history)’란 용어를 쓴 이유도 이처럼 명확한 저자의 관점 때문이다. 기존 세계사 연구의 유럽-미국 중심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며 국경이 아닌 지구 전체로 시야를 확대하는 지구사는 사상, 인물, 텍스트가 국경을 넘나들며 이뤄낸 상호작용을 기민하게 포착해내는 동시에, 배제되었던 다양한 목소리에 고르게 주목하도록 한다. 

그간 “페미니즘 역사는 대부분 백인이자 교육받은 여성 선구자들이라는 제한된 출연진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러한 기존의 역사서술이 “초기 페미니즘 사상과 행동을 오독할 위험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누가 최초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계보가 구조화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며, 오늘날 우리가 ‘페미니즘’으로 읽을 수 있는 최초의 텍스트들이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의 백인 시민을 기준으로 국가적 우선권을 설정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지적한다.

지구적 관점에 따르면 페미니즘의 시작점과 주요한 사상가들은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1798년 프랑스의 알렉산드리아 침공에 과격하게 항의하던 이집트 여성들이 여성의 고용조건과 가족 내 지위를 논의하기 위해 1799년 결성한 라시드여성회의를 페미니즘의 시작으로 잡을 수도 있다. 아니면 1792년 시에라리온에서 토착민 여성 가구주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순간을 그 시작점으로 볼 수도 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과 정착민 여성들은 1893년에 투표권을 얻었고, 이는 유럽이나 미국의 여성들보다 한참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대안적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구적 관점을 택함과 동시에 유럽 페미니즘의 ‘설정된’ 우선순위에 대항하고 실제 존재하는 풍요로운 역사를 충분히 이야기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자이크 페미니즘’이라는 한층 더 확산적인 개념에 의지한다.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이어 붙여진 여러 조각으로 구성되어 독특한 무늬와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자이크처럼 지구적으로 존재한 페미니즘의 사상, 인물, 텍스트가 한데 모여 구성한 형상으로서 역사를 보고, 그것을 멀리서 또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페미니즘, 또는 페미니스트라는 하나의 거대한 ‘연합’은 여러 운동, 헌신적인 개인, 행동과 아이디어들이 한데 합쳐 이뤄진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는 때로 희미한 영향력의 선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절연과 혁신도 존재한다.

지난 3세기에 걸친 페미니즘 지구사를 연속적인 흐름에서 이야기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몇 가지 입구이자 도약점을 마련하고 그것을 키워드로 페미니즘의 과거를 꿰어나가는 독창적인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키워드는 총 8가지로, 꿈, 생각, 공간, 사물, 모습, 감정, 행동, 노래가 그것이다. 각 키워드에 한 장씩을 할애하여 총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러한 세부 주제 안에서 그간 배제되고 소거되어왔던 목소리들을 고르게 증폭함으로써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지구 곳곳의 풍요로운 페미니즘‘들’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처럼 8가지 키워드로 페미니즘의 과거를 꿰어나가는 저자의 이야기 속에는 무엇보다 국경에 제약되지 않고 지구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페미니스트들 간의 상호작용과 대화가 당대의 활력을 가지고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형적이고 유럽-미국 중심적인 기존의 역사서술에서는 쉽게 포착되지 않았던 지점이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누락되었던 페미니스트들 간의 상호작용들을 목도하다 보면 페미니즘을 단지 해외에서 전래된 수입품이 아니라 일종의 대화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그러한 대화에는 당연하게도 경합, 갈등, 권력 다툼이 자리했다. 또한 세계적으로 페미니즘과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제국주의, 식민주의, 계약노동, 국가주의 등은 폭력과 종속에 기반한 기획이었으며 페미니스트들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다. 

페미니즘 지구사는 단순히 페미니즘, 페미니즘, 그리고 또 다른 페미니즘을 나열하는 식으로 페미니즘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또 다른 역사학자 므리날리니 신하(Mrinalini Sinha)의 말을 빌려 “각기 다른 여성운동들이 지닌 불일치하는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듯, 서로 불일치하는 페미니즘의 여러 꿈을 헤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지구적 페미니즘‘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우리가 과거를 중요한 자원으로 삼을 수 있고,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다른 시대의 페미니스트들이 때로 인종차별, 계급적 편견,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등에 공모했거나, 오늘날 매우 주요하게 여겨지는 의제들을 경시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과거에 그저 절연을 고하거나 환멸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정하기 어렵고 불편한 과거라 할지라도 비교, 재구성,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운동과 행동에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건 지구 페미니즘들의 지형을 실제 그대로 충분히 확장하고 또 있는 그대로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 타협하기 어려운 이데올로기적 차이들을 섣불리 뭉개거나 무시하지 않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여성들이 서로 다른 걸 원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며, 페미니즘의 성패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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