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 주고 받기 … 한일고금비교론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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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주고 받기 … 한일고금비교론 ⑥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3.09.2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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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불교의 경전인 佛經(불경)은 인류가 자랑하는 문자 문명을 가장 방대하고 격조 높게 이룩한 업적이다. 인도 언어를 사용한 여러 경전 필사본을 동아시아로 가져와, 한문으로 번역하고, 그 모두를 집성해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大藏經(대장경)이다. 경전의 번역ㆍ집성ㆍ인쇄를 위한 승려들의 노력을 국가가 지원해, 大藏經을 국가의 표상으로 했다. 이 작업에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관여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大藏經이 이루어진 과정을 살펴보자. 971년에서 983년까지 중국의 <宋版大藏經>(송판대장경)이 1,076부 5,048권의 분량으로 완성되었다. 그 뒤에 宋版이 몇 번 더 이루어졌다. 1031년에서 1064년까지의 <遼版大藏經>(요판대장경), 1148년부터 1173년까지의 <金版大藏經>(금판대장경)이 다시 이루어졌으나, 宋版을 능가하는 업적은 아니었다. 그 세 나라의 대장경판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元(원)・明(명)・淸(청)의 시기에도 대장경을 각기 여러 차례 판각해서 간행했다.

고려에서 1074년에서 1082년까지 <初雕大藏經>(초조대장경) 1,067부 5,048권의 규모로 만들 때 시작되었으나, 1232년에 몽고란 때문에 불탔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에 현존 <高麗大藏經>(고려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高麗大藏經>은 宋版을 받아들여 기본으로 하고, 遼版 등의 다른 자료도 보태 한문본 불경을 집대성하고 총정리한 성과이며, 교정을 철저하게 해서 완벽을 기했다. 1,516부 6,815권이고, 경판은 81,258매이다. 그 전부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현존 최고의 대장경이다. 그 인행본을 일본이나 유구에서 다투어 얻어갔다.

조선왕조는 유교국가여서 대장경을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印行(인행)을 자주 하면, 종이를 많이 소비하고, 판목을 보관하고 있는 海印寺(해인사) 인근 백성들의 노역이 필요한 것을 염려했다. 국가나 해인사에 대장경 인행본을 대가를 받고 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요청자의 자격을 심사해 합당하다고 인정되면 대장경 인행본을 무료로 주었다.

그 내역을 보자. 일본 국왕이나 왕족이 30회 청구해서 22회 받아가고, 大內(오우찌)라고 하는 유력한 지방통치자가 17회 청구해서 13회 받아가고, 對馬島主(대마도주)가 4회 청구해서 3회 받아가고, 다른 여러 지방의 통치자가 도합 15회 청구해서 5회 받아갔다. 모두 합치면 66회 청구해 43회 받아갔다.

1425년(세종 5년)에 승려 圭籌(게이추)가 사신이 되어, 135명이나 되는 인원을 거느리고 와서 대장경판을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국왕의 국서에서 조선에는 대장경판이 여러 벌 있다고 하니, 그 가운데 한 벌만 주면 일본에 안치해놓고 “신앙심이 있는 이들이 뜻대로 인행해 보시를 행하게 해서, 만약 평등한 자비를 움직여, 자기와 남의 구별을 잊게 하고, 법보를 펴서 넓히면”(使信心輩任意印施 若能運平等之慈 忘自他之別 頒法寶而博) 그 공덕이 아주 클 것이라고 했다. 그 국서를 가져온 일본 사신은 대장경 판목을 주면, 해마다 인행본을 청구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조선의 조정에서는 대신들이 의논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지만,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다가 나중에는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곤란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세종임금이 일본 사신에게 공식회답을 하기를, 대장경판은 한 벌뿐이어서 줄 수 없고, 그 대신에 “密敎大藏經板ㆍ註華嚴經板・漢字大藏經全部”를 주겠다고 했다. ‘密敎大藏經板’(밀교대장경판)은 티베트어 대장경인 듯하다. ‘註華嚴經板’(주화엄경판)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漢字大藏經全部’(한자대장경전부)라고 한 것은 <高麗大藏經> 인행본을 말한다. ‘密字’와 구별하기 위해서 ‘漢字’라는 말을 넣었다.

密字大藏經이 조선에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고려시대에 불교를 널리 연구하기 위해서 그런 자료까지 수집했다고 생각된다. 조선왕조에서는 소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데도 주어버리겠다고 했다. 문명권의 범위를 불교 세계 전체로 넓혀 생각하는 전례를 수정해서 한문문명권 이상의 영역은 돌볼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일본 사신은 대장경판을 얻어가지 못하면 문책을 당한다고 하고, 음식 먹기를 거부했다. “주림을 참으며 트집을 하니, 어찌 사신의 체통이라고 하겠는가”라는 질책을 듣고서야 단식을 그만두었다. 위에 든 선물 외에 ‘金字華嚴經’을 더 준다고 하니, 일본국왕이 기뻐할 것이라고 해서 교섭이 일단락되었다.

대장경판을 외교의 방법으로 얻어가지 못하자 군대를 동원해서 탈취하려고 한 계획이 발각된 것이 이듬해 1월 20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 잡혀 있다가 되돌아온 사람이, 일본국왕이 對馬島主에게 그런 목적으로 전함을 수리해두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일본 사신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인 加賀(하야토)란 자가 자기네 사신 圭籌가 본국에 보내는 狀草(장초)를 조선에 알려왔는데, 거기 “대장경판을 요청했으나 얻지 못했으니, 병선 수천 척을 동원해 약탈해 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말이 있었다.

圭籌는 加賀의 절도행위를 심하게 나무라고, 일본에서는 절도죄를 크게 다스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장경 탈취를 계획한 일은 절대로 없었다고 천지신명을 걸고 맹세하겠으니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열거한 천지신명 명단에 일본 神道(신도)의 신들(日本顯化天照大神・天滿大自在天神・一切大小天神地祗)도 있다. 신의 이름을 많이 열거할수록 맹세의 효력이 더 커진다고 생각했다. 불교의 승려이고, 중세보편주의를 표방하는 국서를 가져온 외교사절 최고 수준의 국제적인 지식인이, 다급한 일이 생기자 감추어져 있던 내면을 드러내서 자기네의 고유신앙을 숭상하는 국수주의자로 바뀌었다.

1482년(성종 13년)에는 日本國王(일본국왕) 源義政(미니모토요리마사)이 대장경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다. 두 대목을 든다. “日本國王 源義政이 朝鮮國王殿下(조선국왕전하)에게 답장을 올립니다. 두 나라는 거리가 천리나 되지만, 대대로 좋은 이웃으로 지내온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아니, 어찌 사람이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시끄러운 일이 백 가지로 일어나서 잠시 폐지했습니다. 그 때문에 소식이 끊어지고 사이가 벌어진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땀 나고 부끄럽습니다. 땀 나고 부끄럽습니다.”(日本國王源義政 奉復朝鮮國王殿下 兩國千里 世修隣好 天知地知人焉瘦哉 然而 比年我國搶攮百色 暫廢 是以久阻音耗間之罪 不可遣也 汗愧汗愧”) “대장경을 구해서 절에다 안치하고, 복을 심을 자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法寶(법보)를 나누어주셔서 변방 백성을 이롭게 하고, 자재를 보시해서 불교의 이로움이 일어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上國(상국)의 감화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欲求大藏經 安置寺內 以爲一方殖福之地 庶幾分法寶 以利邊民 施資財 以興梵利 則上國之化 無所不至也)

1478년(성종 9년)에는 久邊國主(구변국주)라는 李獲(이획)이 사신을 보내 대장경을 원한다는 국서를 전달했다. “臣(신)이 비록 不肖(불초)하오나 귀국과 함께 大明國(대명국)을 섬기고 李(이)로 성을 삼은 것도 같으니, 오랜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三寶(삼보)를 믿은 지 오래 되고, 또한 불사를 창건했으므로 대장경을 크게 소망합니다.”(臣雖不肖 與貴國同事于大明國同以李爲性 夙緣可庶幾乎 吾久信三寶 而創建佛寺 大藏經尤望之) 久邊國이라는 나라는 없고,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고 여겨 요청을 거절했다. 大藏經을 탐낸 어느 일본인이 사기를 친 것이다.

1482년(성종 13년)에는 더 이상한 국서도 왔다. “南閻浮州(남염부주) 東海路 夷千島王(이천도왕) 遐叉(하차)가 朝鮮殿下에게 글을 올립니다. 朕(짐)의 나라에는 원래 佛法이 없었으나, 扶桑(부상)과 교통하고 화친한 이래로 佛法이 있는 줄 안 것이 지금부터 삼백여년 전입니다. 扶桑에서 가진 불상과 경전을 모두 구해서 가졌으나, 扶桑에는 원래 大藏經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얻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南閻浮州 東海路 夷千島王遐叉 呈上朝鮮殿下 朕國元無佛法 自與扶桑通和以來 知有佛法者 于今三百餘歲 扶桑所有佛像經卷 悉求而有之 扶桑元無大藏經 以此未得之久) “大藏經을 하사하시어 朕의 三寶(삼보)를 온전하게 해주신다면 귀국의 王化(왕화)와 불법이 멀리 東夷者(동이자)에까지 미치는 일입니다.”(俯賜太藏經 以令全朕三寶者 貴國之王化佛法 遠矣被東夷者也)
夷千島라고 한 나라가 扶桑이라고 일컫는 일본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大藏經은 구하지 못해 직접 요청한다고 했다. 이 국서도 일본인이 조작한 가짜라고 여기고 응락하지 않았다. 夷千島國이 아이누인이 세운 나라일 가능성이 있다는 반론이 근래에 제기되었다.

일본에서 大藏經을 얻어가는 관습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사라졌다. 그때 관계가 악화되어 일본에서 대장경을 요청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에 일본에서 판각을 해서 대장경을 인쇄해냈다. 목판인쇄의 기술자를 대거 납치해갔기 때문이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약탈전쟁을 진행한 대가를 인쇄와 도자기 기술 확보에서 얻었다.

조선의 대장경판을 얻어가려고 애쓰고, 무력으로 탈취할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 일본에서 임진왜란 때에 대장경판을 그대로 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해인사를 점거하지 못했거나 대장경판을 가져가는 일이 너무 번거로워 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장경판을 가져가는 대신에 목판인쇄 기술자 刻手(각수)들을 납치해 가는 것이 수고는 적고 효과는 커서 훨씬 현명한 방책이었다.

인쇄기술을 확보하면 대장경뿐만 아니라 다른 책을 찍어내는 데도 널리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의 인쇄문화가 크게 일어났다.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인쇄물은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훨씬 번창했다. 소설 출판업이 발달한 것이 그 때문이다. 일본이 세계 전체에서 크게 앞서나가는 인쇄와 출판의 나라가 되는 시발점을 그때 마련했다.
     
일본에서 대장경을 판각해서 간행하는 일을 두 번 했다. 1637년부터 1648년까지의  6,323권이 첫째 것이고, 1669년부터 1681까지의 6,956권이 둘째 것이다. 첫째 것은 중국의 南宋(남송) 및 元의 대장경에 의거해 만들었으며, ‘一切經’(일체경)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高麗大藏經>과 거리를 두었다. 착오가 많고 내용이 부실했다. 이것은 판각 기술자의 실수 탓이 아니고, 원고를 작성하고 교정을 보는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만든 것은 중국 明版(명판)의 복각인데, 원본 자체에 결함이 있어 온전할 수 없었다.

근대 방식의 활자인쇄를 도입하는 데 한국보다 앞선 일본에서 활자본 대장경 결정판을 이룩했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큰 책 100권으로 낸 <大正新修大藏經>(대정신수대장경)에서 모두 <高麗大藏經>을 저본으로 삼고, 大藏經이라는 명칭을 회복했다. 이번에는 교정을 철저하게 신뢰할 수 있게 했다.

근대활자본의 시대가 시작되자, 오랫동안 후진이던 일본이 일거에 선진으로 나섰다.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大正新修大藏經>을 가져가 기본자료로 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역전을 이룩했다. 주던 大藏經을 받게 되었다. 불교 연구도 일본이 선도해, 가깝고 먼 다른 모든 나라가 따르도록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근대 이후의 일본학문 가운데 성취도가 가장 높은 것이 불교학이다.

<大正新修大藏經>에 <三國遺事>(삼국유사)도 들어 있다. 이것은 후진이 선진으로 전환될 때 당연히 보여주는 포용력이다. 우리는 <韓國佛敎全書>(한국불교전서)를 간행해 열심히 공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의 불교학을 대폭 수용해야 선후 역전을 다시 이룩할 수 있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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