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최대의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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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의 명절?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09.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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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며칠 뒤면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언론에서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말을 관례적으로 쓰곤 한다. 그런데 이 ‘민족 최대의 명절’은 추석 때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음력설에도 또 다시 이 ‘최대의 명절’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최대’라는 말을 해마다 두 번 쓴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데 신문과 방송에서는 꽤 오랫동안 이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써 왔던 것이다.

어찌 보면 ‘최대’가 한 해에 두 번 찾아온다는 말이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음력설이나 추석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혹은 모처럼 찾아온 연휴를 즐기러 길을 나서니 말이다. 강원도 정선이 고향인 필자도 명절 때가 되면 항상 고향을 찾는다. 그리고 정선에서 가까운 동해시에 처가가 있어서 추석에도, 음력설에도 꼭 백복령을 넘는다. 이 ‘민족 대이동’ 기간 동안 강원도와 수도권을 잇는 영동고속도로, 광주원주고속도로와 42번 국도의 교통량을 늘리는 데 필자도 티끌만큼이나마 일조하는 셈이다. 필자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절에 어김없이 길이 막히는 것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이것이 현실이라 해도 이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음력설)’이라는 표현은 좀 짚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여기에 쓰인 ‘최대’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흔히 ‘최상급’이라 불리는 영어 단어 ‘best’ 등의 사례를 들어, 특히 ‘one of the best’라는 표현을 들어 한국어에서도 둘 이상에도 ‘최대’니 ‘최상’이니 하는 말을 쓸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best’는 본래 ‘최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한국어에는 ‘둘’을 ‘셋 이상’과 구분하는 ‘쌍수’ 개념이 전혀 없지만 영어와 독일어 등 일부 언어에는 비교급 표현에서 쌍수(둘)와 복수(셋 이상)의 구분이 부분적으로 나타나는데, 영어를 예로 들면 ‘better’가 비교급 쌍수에 해당하고 ‘best’가 비교급 복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분류된다. 즉 셋 이상을 비교해서 ‘더 좋은 것’을 ‘best’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one of the best’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다. ‘one of the best’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풀이하면 ‘셋 이상의 것들 중에서 다른 것보다 더 좋은 것(best) 중의 하나(one)’라는 뜻이 된다. much-more-most, big-bigger-biggest 등 다른 어휘들의 의미 차이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이때 ‘best, biggest’ 등은 꼭 ‘가장 ◯◯한 단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견주었을 때 비교적 ◯◯한 것’이기만 하면 모두 아울러 가리킬 수 있다. ‘one of the best’라고 일컬어지는 것들 중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등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서울특별시는 ‘one of the biggest cities in the world’가 될 수 있다. 세계에는 서울보다 더 큰 도시들도 많지만, 그래도 서울은 세계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큰 도시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셋 이상 중에서 다른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단 하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예컨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중에서 ‘best’는 단연 금메달 하나다. 물론 은메달, 동메달도 ‘good’은 될 수 있겠지만 ‘best’를 가리자면 금메달이 ‘best’라는 이야기다. 이 상황에서 ‘better’라는 말을 꼭 써야겠다면 ‘better than any other’라고 해야 한다. ‘여러 개 중에서 특히 더 좋은 것’ 이외의 것들을 모두 ‘any other’라는 말로써 ‘better’인 것과 대비되는 한 부류로 뭉뚱그려야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어 ‘최대’라는 말로 돌아와 보자. 여기에 들어가는 한자어 ‘최(最)’는 현대 한국어에서 ‘으뜸’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까 ‘최대’는 영어의 비교급과 같이 ‘더 큰 것’을 가리킨다기보다 ‘으뜸으로, 제일로 큰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둘 이상의 것이 크기 면에서 공동 1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그중 어느 하나만을 가리킬 때 ‘최대의 ◯◯(들) 중 하나’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추석과 음력설이 정말로 똑같이 큰 명절이라면 그 각각을 ‘최대의 명절(들) 중 하나’라고 불러도 논리에 맞는다는 뜻이다. 다만 이 경우는 추석과 음력설이 동등하게 가장 크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들 사이에 차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 차등이 엄연히 있는 것들 여러 개를 한데 묶어 일컬으면서 ‘으뜸’을 가리키는 ‘가장, 최대, 최고’ 등의 어휘를 쓴다면 어색한 말이 되고 만다. 예컨대 서울특별시를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들 중 하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서울보다 더 큰 도시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울을 ‘one of the biggest cities in the world’라고 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토박이말 ‘가장’과 한자어 ‘최’ 등이 영어의 ‘best, most, biggest’ 등과 가리키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앞에 나온 ‘one of the biggest cities’를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가장 큰 도시들 중 하나’라기보다 ‘특히 큰 도시들 중 하나’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런데 추석과 음력설이 ‘공동 1위’로 큰 명절이라는 것을, 그래서 ‘최대의 명절 중 하나’라는 말이 논리에 부합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민족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인 추석’이라고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민족의 큰 명절 추석’ 정도로만 이야기해도 좋지 않을까. 이처럼 단순히 크다고만 하면 굳이 음력설 등 다른 명절들과 비교해서 시비를 가릴 필요도 없어지니 그 또한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만일 ‘◯◯(들) 중 하나’라는 말을 꼭 써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도 ‘민족의 큰 명절 중 하나’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사실 이 ‘최대, 최고’와 같은 말에 대해서는 따져 보아야 할 것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칼럼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께 올 추석에 좋은 일들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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