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을 K 문학으로 이끈 번역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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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을 K 문학으로 이끈 번역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9.17 1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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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 문학의 탄생: 한국문학을 K 문학으로 만든 번역 이야기 | 조의연·이상빈·제이미 장·로렌 알빈·배수현 외 9명 지음 | 김영사 | 416쪽

 

이 책은 세계 속 한국문학의 위상을 높인 번역가와 번역 연구자들의 이야기다. 한국 현대 시 번역의 최고 권위자 안선재와 한국 현대 소설 번역의 최고 권위자 브루스 풀턴을 비롯하여,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등을 번역한 제이미 장, 김혜순의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등을 번역한 로렌 알빈과 배수현, 윤고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 등을 번역한 리지 뷸러, 김이듬의 시집 『히스테리아』 등을 번역한 제이크 레빈 등 해외 주요 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또 수상하며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린 번역가들의 진솔하고 진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 분야의 대가가 전하는 문학 번역 과정과 원칙 그리고 노하우를 전하고, 그동안 작가와 작품의 이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번역가들을 조명하여 이들의 노고를 기리고 번역 문학 작품을 새롭게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에서는 하나의 번역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번역가가 겪는 깊은 고민과 지난한 과정을 담았고, 2부에서는 오역 논란에서 벗어나 창조적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뤘다. 3부에서는 ‘작가와 번역가 그리고 연구자가 당면한 과제를 심도 있게 살폈고, 마지막 4부에서는 한류 열풍 속 K 문학의 위상과 실체를 드러냈다. 

번역가가 들려주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는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번역한 제이미 장의 글과 김혜순의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을 공동 번역한 로렌 알빈·배수현의 글에서 펼쳐진다. 제이미 장은 원작을 처음,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읽었을 때 느낌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설명하며, 가부장적 사회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주인공 김지영의 목소리를 원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로렌 알빈과 배수현은 시 번역에서 수반되는 탐구와 거듭되는 수정을 구체적 예시와 함께 다루며, 번역가의 배경에서부터 작가와 작품 주제를 파악해 나가는 과정이 문학 번역에서 왜 필요한가를 상세히 기술한다. 

한국 소설 번역의 거장인 브루스 풀턴은 역사적 고통과 사회적 갈등 그리고 치유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소설을 바라본다. 그가 주찬 풀턴과 함께 번역한 조정래의 『오 하느님』, 김사과의 『미나』, 천운영의 『생강』, 김숨의 『한 명』, 공지영의 『도가니』, 정용준의 『프롬 토니오』, 홍석중의 『황진이』와 같은 작품이 왜 중요한가를 설명하며, 문학 작품을 번역한다는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공감과 통찰력을 확대해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정은귀는 번역에서 창조성과 충실성은 서로 배타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번역가는 반복적인 원작 읽기를 통해 원전 텍스트의 맥락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는 충실성을 가지며, 동시에 작품을 재해석하고 이를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재구성하는 창조성도 지닌다는 것이다. 리지 뷸러는 번역본이 비록 원본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지만, 번역본이 원본에 대해 종속적 관계에 있지 않으며, 번역이 원작의 ‘두 번째 삶’을 만드는 ‘재활용 행위’라고 해석한다. 나아가 그는 재활용 행위로서의 번역을, 새로운 상품을 무한히 창출하도록 압박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행위’로 본다. 전 미세리는 현재 신경망 기반의 기계 번역이 문학 작품에서 흔히 등장하는 은유와 암시는 물론, 문장 단위 너머 존재하는 의미관계도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함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기계 번역은 번역가가 경험하는 창조적 의식 과정을 거칠 수 없으며, 이것이 기계 번역과 인간 번역의 본질적 차이를 드러낸다고 강조한다.

한국문학 번역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안선재는 지난 100여 년간의 한국문학 번역사를 간결하면서도 매우 흥미롭게 들려준다. 그는 세계 독자에게 호소력 있는 한국문학이 되기 위해서 작가들은 “즐길 거리가 되고 상상력 풍부하며 때로 머리카락이 쭈뼛 설만큼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전승희는 번역의 창조성을 강조하면서도 책임 있는 번역가의 자세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좋은 번역을 만들어내기 위해 번역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는 조력자들과 협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빈은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담론 및 연구가 현재까지 활발히 진행되지 않은 점을 안타까워하며, 과도한 오역 논쟁 및 수상작 중심으로 편중된 연구, 다른 학문과의 교류 부재, 작가·번역가·독자에 초점을 맞춘 연구 부족 등을 지적하며, 한국문학 번역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K 문학은 한류의 하나로서 조명되기도 한다. 제이크 레빈은 지난 20여 년간 한국문학번역원의 막대한 지원으로 브랜드화된 K 문학이 K 문화 콘텐츠의 하나로 축소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그러면서 그는 K 문학 번역가는 K 콘텐츠를 생산하는 임금 노동자이지만, 동시에 번역가로서 창의성을 지닌 예술가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형진은 한국문학 번역의 생산과 소비를 문화자본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장주의 관점에서 밀도 높게 논의한다. K 문학이 세계 시장에서 더 많이 읽히기 위해서는 그간의 ‘국수주의적인 번역’을 지양하고 K 팝의 문화 마케팅 전략을 참조할 것을 제안한다. 신지선은 한국문학번역원이 K 문학을 브랜드화하고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이라는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지난 20여 년에 걸쳐 진행한 사업들을 ‘평가 시스템’과 ‘지원 도서 선정 방식’ ‘전문 번역가 육성 사업’을 중심으로 재조명한다.

1922년 제임스 게일이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한 이래 한국문학 번역 역사는 이제 막 100여 년을 넘겼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세계문학의 변방에 있었던 한국문학은 지난 10여 년 사이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며 세계적인 문학으로서의 발돋움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작가의 개성적이고 실험적인 서술 방식과 한국 역사나 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주제 선정, 그리고 세계 출판 시장에 한국문학을 알리기 위한 정부의 다양한 지원 등이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면서 현지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온 문학 번역가들의 노력이다. 이 책은 문장 하나마다 스며 있는 번역가들의 땀과 고뇌를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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