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지성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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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지성인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9.1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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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한국 지성의 몰락: 미네르바 부엉이는 날지 않는다 | 송호근 지음 | 나남출판사 | 372쪽

 

20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저물고 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가 열렸다. 첨단기술(대가속)과 함께 기후변화(대자연), 글로벌 시장(대시장) 등 문명 전환의 충격은 통제 불능의 단계까지 치달으며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고민하고 여론을 선도할 현명한 지식인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인 사회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챗GPT와 AI가 등장하면서 지식인의 권위가 무너졌고, 첨단과학의 위세에 눌려 지성의 요람인 인문사회과학의 위상도 떨어졌다. 세기적 문명사가와 지성인의 비판적 담론이 꾸준히 생산되는 외국에 비해 한국의 사정은 특히 빈약하다. 시대의 어른이자 지성인은 자취를 감췄고, 공공지식인의 존재가 사그라들며 공론장은 혼란에 빠졌다. 지식인들은 대학에서 은신하거나 정치권으로 흡수돼 지식인의 본분을 망각하게 됐다. 대학은 사회의 리더가 아니라 추종자로 전락했다.

지식인 사회는 왜 이토록 쇠퇴하였는가? 한국 지식인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다시 살아날 길은 없는가? 이 책은 저자 송호근 교수가 대전환기를 맞아 세계 지성사의 흐름과 한국 지식인 사회를 성찰하고 지식인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한 책이다. 

저자는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세계 지성사와 문명사의 큰 흐름을 읽어낸다. 나아가 지식인 사회의 성찰을 통해 한국의 지식인이 다시 국민들에게 존경받고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이끌려면 국민과 소통하고 공론장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공공지식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국민이 갈등과 대립에서 벗어나 서로 화합하고 21세기의 시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저자는 세계 문명사와 지성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살펴본다. 1918년《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학자의 소명의식을 강조한 막스 베버, 1930년대에 독립정신에 의해 사고하는 자유부동적 지식인 개념을 통해 나치즘을 묵인하는 독일 지식인을 비판한 만하임, 1962년 합리적 여론 형성 공간인 공론장 이론을 제시하며 민주적 여론 창출의 물꼬를 튼 하버마스, 2014년 감시 자본주의 개념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첨단기술의 위험성을 일깨운 주보프 … . 서구 지성의 역사는 은둔자에서 시민사회와 공론장을 이끄는 리더로 진화했다.

우리나라에도 시대의 화두를 던지며 공론장에서 활약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1960~70년대는 ‘문사철의 시대’, 19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라 불릴 정도로 대중과 교감하며 사회참여를 이끄는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아카데믹 자본주의가 학계를 휩쓸면서 대학은 전문가 양성소로, 교수들은 논문제조기로 전락했다. 학문은 더 쪼개지고 미세화되면서 시대의 큰 그림을 담은 전망을 내놓기 어렵게 되었다. 지식인들이 떠난 한국의 공론장은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 지식인들이 다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이끌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친구와 원수 간의 협동’을 통해 민주적 공론장을 회복하는 것을 그 답으로 제시한다.

21세기 들어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했지만 한국 사회는 20세기의 비극인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의 상처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한국 공론장은 역사적 단층선(일제의 폭력에 짓밟힌 국가들의 반일전선)과 군사적 단층선(중국, 러시아, 북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군사적 대치선)에 갇혀 5천만 국민이 서로 격돌하고 있다. 정치인, 언론인, 논객들은 이해관계에 얽혀 이러한 대립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나아지지 않는 고질적 병폐이다.

저자는 말한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혼돈의 공론장으로 나와야 한다. 국민들이 합리적 토론과 민주적 합의를 통해 지난 세기의 아픔에서 벗어나 21세기 문명의 새로운 문제에 대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역사의 발전을 추구하고 국민을 바른 길로 이끄는 지식인의 숭고한 사명을 되찾는 일, 이것이 한국 지식인의 시대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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