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 가볍게 슬슬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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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 가볍게 슬슬 읽으세요!
  • 안삼환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 승인 2023.09.1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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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괴테의 『파우스트』 읽기 (안삼환 지음, 세창미디어, 164쪽, 2023.08)

 

독일이 낳은 세계적 시인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는 교양인, 또는 지성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다. 인간 세사에 대하여 이 문학작품보다 더 광범위하고도 심오하게 천착해 놓은 책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당한 지식인이라 하더라도, 막상 이 작품을 읽어내기란 그다지 만만치 않다. 소설도 아니고 희곡인 데다, 대화가 운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 읽기 시작할 때, 소설처럼 익숙하지가 않다. 게다가 처음 읽기 시작하는 부분이 「헌시」, 「극장에서의 서설」, 「천상에서의 서막」 등 세 편의 ‘서막(Vorspiel)’으로 되어 있어서, 작품의 구조를 미리 알지 못하고 읽기 시작한 경우, 다소 얼떨떨하고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다.

사실,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책은 해변의 파라솔 밑에서 읽을 책은 아니다.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독일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다소의 사전(事前) 지식이 있어야 하고, 삶의 보편적 의의를 한번 탐구해 보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사전 지식을 모두 갖추고 책상 앞에 단정히 정좌하신 독자에게 필자로서는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싶고, 그러한 독서 자세가 보람찬 열매를 거둘 것으로 확신한다.

하지만, 필자가 일반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우선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작품의 명성에 조금도 주눅 들지 마시고, 인간 세사에 대해 하는 얘기 중에 하늘 아래에 뭐 아주 새로울 게 있겠느냐는 듯이 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이 작품을 가볍게 대하라는 것이다. 즉,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독파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아무 데나 마음이 가는 대목을 선택해서 한번 소리 내어 죽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한두 장면 읽다가 피곤하거나 다른 급한 일이 끼어든다면, 잠시 책을 덮어뒀다가, 무슨 사전이나 성경처럼, 다시 생각나면, 그때 또 읽어봐도 된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헌시」, 「극장에서의 서설」, 「천상에서의 서막」의 순서로 읽을 게 아니고, 예컨대, 「밤」의 장면에 나오는 저 유명한 파우스트의 독백부터 소리내어 읽어보면 어떨까?


  파우스트:
    아, 지금까지 나는
    철학, 법학, 의학을,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신학까지도,
    뜨거운 노력을 기울여 철저히 공부했다.
    그런데 여기에 서 있는 이 나는 가련한 바보,
    [ ... ]
    우리 인간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만 알겠구나!


이것은 파우스트가 학자로서 아무리 공부와 연구를 거듭해 봐도 “이 세계의 내밀한 핵심을 틀어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다는 절망에 봉착한 상황인데, 이게 바로 ‘학자 비극’으로서 파우스트가 ‘악마와의 계약‘을 맺게 되는 원인이 된다.

 

                                《파우스트》 1부 초판(1808년) 표지(왼쪽)와 괴테의 초상(오른쪽).<br>
                                《파우스트》 1부 초판(1808년) 표지(왼쪽)와 괴테의 초상(오른쪽).

이쯤 해서 그만 책을 덮어도 좋으리라. 다만, 눈길과 손길이 아주 쉽게 닿는 책상 위에, 또는 침대의 머리맡에 『파우스트』를 두는 것이 좋다. 그다음 번에는 파우스트가 악마의 도움으로 회춘을 하자, 길거리에서 순진한 처녀 그레첸에게 접근하는 장면을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파우스트:
    아름답고 귀한 아가씨, 제가 이렇게 팔을 내밀어
    아가씨를 댁으로 모셔다드려도 될까요?

  그레첸:
    저는 귀한 집 아가씨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아요.
    데려다주시지 않아도 집까지 갈 수 있어요. (뿌리치고 가버린다.)

  

바로 이 장면에서 ’그레첸 비극‘이 시작된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아 보이는 청년이 말을 걸어온 데에 대해 일단 뿌리치고 떠나왔지만, 순진한 처녀의 호기심이 서서히 발동하고, 파우스트는 악마의 도움으로 그레첸을 유혹하며, 그 과정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를 죽이고, 그레첸과 아기 등 도합 4명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득죄(得罪)를 한다.

여기까지가 ’학자비극‘과 ’그레첸 비극‘, 즉 『파우스트』의 제1부가 되는 셈인데, 독자는 여기서 바로 제2부로 넘어가지 말고, 이제는 이 두 비극의 구체적 내용을 이루는 각 장면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슬슬 조금씩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이를테면, 「우물가에서」라는 장면에서 그레첸의 친구 리스헨이 그레첸에게 베르벨헨에 관한 소문을 들려주며, “걔가 이제 두 사람 분을 먹고 마신다”고 했을 때, 그레첸은 베르벨헨의 임신 사실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일임을 통감하게 된다. 그다음 장면 「성 안쪽 길」에서 그레첸이 ‘고통의 성모상’ 앞의 꽃병에 꽃을 꽂아드리면서, “도와주소서! 치욕과 죽음에서 저를 구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독자는 사건 진행에 어느새 깊이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게 『파우스트』의 원래 줄거리인데, 무엇 때문에 『파우스트』 제2부가 추가로 쓰였을까? 왜 ‘헬레나 비극’과 ‘행위자 비극’이라는 두 비극이 또 첨부될 필요가 있었을까?

북구 게르만인 파우스트는 남구 그리스의 미인 헬레나와의 조화로운 결합을 원한다. 이것은 독일의 시인 괴테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수용을 통해 바이마르 고전주의 문학이라는 인문성 이상(理想)에 도달한 짧은 예술적 득의(得意)를 상징한다.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아들 에우포리온(Euphorion)은 공중을 높이 비상하려다가 이카루스(Ikarus)처럼 추락하고 마는데, 이것이 바로 ‘헬레나 비극’이다. 한 장면씩 여유롭게 읽어 나가다 보면, 시인 괴테의 문학적 성취의 짧은 영광의 순간과 그 덧없는 미학적 몰락을 추체험할 수 있으리라.

‘행위자 비극’은 또 무엇이며, 뒤늦게 이것이 왜 필요한가? 파우스트는 이번에는 간척사업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행위자’로서 성취를 얻고자 한다. 황제를 도와 전공을 세운 파우스트는 그 보상으로 해안습지를 봉토로 받아, 간척 사업을 시작하는데, 장차 개척한 자신의 땅과 그 위에서 생활하는 백성들을 굽어보고 싶다며, 해안의 언덕을 이미 차지하고 있는 원주민 노부부한테 대토(代土)를 해 주고 그들이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록 조치하라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하지만, 악마는 그 노부부의 오두막에 불을 질러 노부부와 그들의 손님인 청년 방랑자를 불태워 죽인다.


  파우스트: 
   내가 말할 때 너희는 귀가 먹었더란 말이냐?
   대토해 주려고 한 것이지 강탈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행위자’ 파우스트의 이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훌륭한 업적을 내려다가 결과적으로 세 명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책임을 면치 못함으로써 다시 한번 득죄한다.

그러나 죄인 파우스트의 영혼은 ‘악마와의 계약’대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그 영혼을 받아서 영광의 성모와 그녀를 시봉(侍奉)하고 있는 그레첸한테로 데리고 올라간다.

여기서 저 유명한 마지막 2행, 즉 “영원하고도 여성적인 것이 / 우리를 이끌어 올리는도다”라는 천사들의 합장이 작품 『파우스트』를 끝맺고 있다.

‘영원하고도 여성적인 것(das Ewig-Weibliche)’의 정확한 해석은 참으로 어렵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영원히’가 ‘여성적인 것’을 수식하는 부사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오역이 된다. ‘영원한 것’과 ‘여성적인 것’이 다시 복합명사로 된 그 무엇 – 이것은 죄인 파우스트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의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괴테의 현묘(玄妙)한 개념일 텐데, 이것을 잘 설명한다는 것이야말로 괴테 연구가들의 ‘영원한 숙제’이다.

숙제가 없다면, 어떻게 심오한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괴테는 죄인 파우스트를 ‘최후의 심판’ 앞에 세운 것이 아니라 영광의 성모와 회개하고 있는 여성 그레첸 앞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보다 더 인류보편적인 어떤 상상의 내세 앞에 죄인 파우스트를 세우는 새로운 상상력의 결과이다. 

아마도 괴테는 자기의 모든 인생 체험과 거기서 생긴 자신의 죄업과 자기반성을 파우스트라는 인물에다 투영하였고, 그 결과 이 파우스트가 결국 인간의 삶에서의 온갖 영광과 치욕을 함께 다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세계적 시인으로서도, 일국의 재상으로서도 영화의 극점까지 올라가 본 괴테는 아마도 이 세상의 어떤 삶도 완전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바로 이 깨달음에서 『파우스트』라는 불후의 ‘인생독본’이 생긴 것이다.

바로 이런 인식의 순간, 독자는 문득,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도 혹시 파우스트의, 아니, 괴테의 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독자는 결국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 “아, 파우스트여, 아니, 괴테여, 그대도 결국 한 인간이었구나!”


안삼환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서울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본(Bonn)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괴테학회장, 한국토마스만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위원장 등을 지냈다. 편·저서로 『괴테, 그리고 그의 영원한 여성들』, 『전설의 스토리텔러 토마스 만』, 『괴테, 토마스 만 그리고 이청준』 등이 있고, 역서로 『젊은 베르터의 괴로움』(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괴테) 등 다수가 있다. 「한독문학번역상」, 「한국출판문화상(번역부문)」, 「PEN번역문학상」, 「야콥 및 빌헬름 그림 상」을 수상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 「십자공로훈장」(2013)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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