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이 이야기』와 K-문학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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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이 이야기』와 K-문학의 미래
  • 박종성 충남대학교·영문학
  • 승인 2023.09.1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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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성 교수의 〈문학 에세이〉

 

 

1. 『파이 이야기』에 길을 묻다

지난 2023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코엑스에서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렸다. 이 행사는 소설 『파이 이야기』(Life of Pi, 2001)를 재소환했다. 이번 도서전의 ‘스포트라이트 컨트리’는 한국과 수교 60주년을 맞이한 캐나다였다. 대산문화재단은 캐나다 소설가 얀 마텔(Yann Martel)을 초청하여 2023 ‘세계작가와의 대화’ 강연을 진행했다. 강연 제목은 「우리 안의 동물성」(The Animal in You)이었다. 강연의 요지는 인간이 신과 동물과 공생적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이 이야기』는 2002년 부커상 수상작으로 전 세계 50개국에서 출간돼 1,200만 부가 팔렸다. 이어 2013년에 아시아인 이안(Lee Ang) 감독에 의해 CG 기술을 활용한 3D 영화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얻었으며 급기야 오스카 4관왕을 거머쥐었다. 국내에서는 2004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표류기와 해양 소설, 그리고 철학 소설 등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다. 한국문학(K-문학)의 도약을 위해 『파이 이야기』에 길을 묻는다. 

 

2. 『파이 이야기』가 캐나다 소설?

얀 마텔이 캐나다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파이 이야기』를 캐나다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매우 약하다.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의 배경은 인도와 태평양, 그리고 멕시코다. 소설에서 위니펙과 토론토 대학 이름이 언급된 정도다. 위니펙은 16세 인도 소년 파이(Pi)의 가족이 일본 화물선 침춤호(Tsimtsum)를 타고 이민을 떠나 도착할 종착지다. 토론토 대학은 파이가 장장 227일 동안(1977년 7월 2일부터 1978년 2월 14일까지) 표류한 후 극적으로 구조되어 캐나다의 가정에 입양되어 다니는 학교다. 캐나다의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 거의 묘사되어 있지 않다. 어찌 된 일인가.

『파이 이야기』에서 마텔은 이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신과 동물(맹수)과 ‘공생적 관계’(a symbiotic relationship)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언어로 신과 동물과 소통할 수는 없다. 신과 동물은 인간의 이성의 범주 너머에 존재하는 미스터리다. 한 인터뷰에서 마텔은 “어떻게 보면 인간은 신적인 존재와 동물 사이에 만나는 접점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김용출 대담). 마텔은 종교가 절망적 인간을 ‘강화하는’(empower)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종교적 믿음이 없다면 인간이 고통을 완화하고 절망을 극복하기란 어렵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종교는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 제도적 종교가 아닌, 초월적 존재인 신과 직접적·개인적으로 접촉하는 특별한 경험을 의미한다. 

                         <Life of Pi> Movie Poster

동시에 마텔은 인간이 (야생) 동물에 좀 더 다가가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주인공 파이는 토론토 대학에 진학하여 종교학과 동물학을 전공한다. 그 이유는 종교학과 동물학이 신의 존재와 동물에 대한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상상력과 공감력 그리고 열린 마음이 수반된다. 이처럼 마텔은 사유의 모험을 감행한다. 

 

3. 초국가적 소설 『파이 이야기』

먼저 얀 마텔의 성장 배경을 살펴보자. 그는 1963년 스페인에서 캐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났고, 퀘벡 출신으로 불어를 구사한다. 캐나다 트랜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27세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파이 이야기』의 「작가 노트」에서 언급된 폰티체리(Pondicherry; 불어 발음은 퐁디셰리)는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였다. 파이의 가족은 폰티체리에서 운영하던 동물원을 닫고(폰티체리가 인도 연합에 들어간 시점은 1954년 11월이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그렇다면 인도의 퐁디셰리와 캐나다의 퀘벡 사이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프랑스어권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마텔은 초국가, 탈경계, 다문화의 특징을 지닌다. 한국 작가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파이 파텔(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고 별명은 파이다)은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받아들인다. 그의 개방성 혹은 유연성이 돋보인다. 사냥꾼에 포획된 벵골 새끼 호랑이에게 사냥꾼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이 부여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과 동물 간 공생적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장치이다. 맹수가 사람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운송 담당 기차 역무원의 터무니없는 실수 탓이다. 호랑이의 본래 명칭은 “목마른 미상(未詳)”(Thirsty None Given)이다. 파이는 맹수에게 차츰 마음을 열고 다가간다. 제3부에서 파이는 인간의 “지나친 포식성”(excessive rapaciousness)에 주목한다. 그는 인육을 먹는 요리사의 이야기를 꾸며내어 인간이 맹수 호랑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에둘러 말한다. 요리사가 “악마”, “괴물”, “동물”, “식인종”으로 돌변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자문하게끔 만든다.

『파이 이야기』에서는 다국적 요소가 캐나다적 요소가 대체한다. 파이와 그의 가족들은 인도의 동물원을 처분하고, 파나마 국적의 일본 화물선(오이카 해운사)을 타고, 캐나다로 향한다. 그의 가족과 동물들이 탄 배가 마두라스에서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처 향해 중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나서 침몰한다. 파이는 구명보트에 의지하여 멕시코 해안에 극적으로 도달한다. 제3부에서는 두 명의 일본 운수성 해양부 소속 직원들이 베니토 후아레스 병원을 방문하여 생존자 파이와 현장 면접을 진행한 후 공식 보고서를 작성하여 침몰 사건을 종결하고 보험금을 지급한다. 파이는 캐나다의 한 가정에 입양되고 그곳에서 대학에 다닌다. 세 개의 대륙과 두 개의 대양을 다룬 공간적 배경만 보더라도 가히 전 지구적 소설이다. 지역주의와 민족주의를 벗어난 점이 도드라진다.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과 2023 서울국제도서전을 맞아 처음 한국을 찾은 작가 얀 마텔이 지난 6월 13일 서울 중구 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mbc 뉴스 캡처

4. 『파이 이야기』에서 세 가지 난제 풀기

『파이 이야기』에는 작가 노트와 모두 100개의 작은 장(章)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화자가 현재 시점에서 서술한 경우는 이탤릭체로 표기하여 시각적으로 구분을 한다. 작은 장은 대부분 짧고 간결하여 그 부분만 골라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62장의 태양증류기(a solar still)와 87장의 꿈의 걸레(a dream rag)가 해당한다. 태양증류기는 마실 물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고, 꿈의 걸레는 표류 중 지루한 시간을 잊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고안된 안대(眼帶)이다. 『파이 이야기』는 표류자에 필요한 생존지침서로서 손색이 없다.

그런데 『파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세 가지가 궁금해진다. 첫째, 구명보트를 타고 멕시코 해안에 도착한 파이와 호랑이가 별다른 작별 의식(儀式) 없이 헤어진 이유는? 둘째, 제3부에서 두 명의 일본인 조사원들(오카모토 토모히로, 치바 아츠로)이 멕시코 병원에 입원한 파이를 방문했을 때 파이가 표류기를 동물이 없는 인간 버전으로 들려준 이유는? 셋째, 파이(Pi)라는 영문 이름과 초월수 파이(π) 부호 간 의미의 연관성은? 이런 질문들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파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밀림을 응시한 채 앞으로 나간다. 이건 영혼이 없고 말을 할 줄 모르는 동물적 속성이다. 반면에 파이는 그와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점을 후회한다. 파이가 호랑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 “인간은 친구가 아니란다. 하지만 나를 친구로 기억해 주면 좋겠구나. 난 너를 잊지 않을 거야”(361). 파이는 호랑이에 다가가 친밀성(intimacy)을 높인다. 어쩌면 인간이 가장 위험한 동물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텔은 인간의 우월감과 인간중심 시각을 비판한다. 참신한 시각이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파이는 화물선 침춤호가 침몰한 후 또 다른 이야기를 꾸며내 일본인 조사관들에게 들려준다. 그런 다음 이들에게 동물 버전과 인간 버전 중 어느 것을 좋아하는지 선택하도록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앞에서 서술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할 필요가 없다. 둘째, 인간이 야생동물에게는 “낯설고 무시무시한 종이라는 사실을”(373)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간들이 등장하는 버전에서 요리사는 극도로 배가 고파 젊은 선원의 인육을 먹는다. 이를 본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다 — “대체 당신이 인간이야? 당신은 양심도 없어”(387). 결국 파텔이 요리사를 칼로 여러 번 찔러 죽이고, 복수심에서 그의 인육까지 먹는다. 일본인 조사관들은 인간들이 등장하는 엽기적인 버전을 차마 믿으려 하지 않는다. 마텔은 인간이 맹수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피신 몰리토 파텔이 파이로 불리는 이유가 드러난다. 파이는 “골진 함석지붕을 인 오두막처럼 생긴 그리스어 알파벳(π)이자, 과학자들이 우주를 이해하는 데 사용한 신비로운 숫자”(30)이다. 파이, 즉 원주율은 원의 지름에 대한 둘레의 비율을 나타내는 상수로서 딱 떨어지지 않고 무한히 계속된다(3.1415926535897…). 원주율은 완전함에 도달하려는 파이의 열망을 상징한다. 마텔은 둥근 우주 속에서 중간자인 인간이 신과 동물과 연결된 공생적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의 철학적 사유가 빛나는 지점이다.

 

 5. 맺는말

현재 국제 문단에서 캐나다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부커상 수상 작가인 마이클 온다체(1992년 『잉글리시 페이션트』), 얀 마텔(2002년 『파이 이야기』), 마가렛 앳우드(2019년 『증언들』; 2000년 『눈먼 암살자』)와 2013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엘리스 먼로(대표작 『디어 라이프』)가 캐나다를 대표하는 현존 작가들이다. 마텔은 캐나다라는 지역성을 벗어나 국제주의적 소설을 쓴다. 아울러 그는 믿음의 필요성과 인간의 포식성 같은 근원적인 문제들을 파고든다. 

『파이 이야기』와 더불어 마이클 온다체(Michael Ondaatje)의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도 캐나다의 문학적 활력을 입증한다. 온다체는 전쟁을 초래하는 국가(주의)를 배신하는 것이 왜 윤리적인가를 따져 묻는다(온다체에 관한 논의는 별도의 지면이 필요하다). 이것은 신선한 철학적 사유다. 인간과 세상과 문명에 대해 진지한 철학적 탐색을 하는 이 두 작가의 사고는 독창적이며 유연하다. 그리고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초국적이며 등장인물들이 다국적이다. 따라서 캐나다적인 특성으로 초국가·다국적·다문화를 꼽을 수 있다. 위기의 한국문학이 변화와 도약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쓰는 정교한 기법, 시각의 확장성과 사고의 독창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참고문헌】
• 김용출. (대담) “신적인 존재에 대한 고민 세속적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 했던 작품.” <세계일보>(2023.06.20.)  
• 대산문화재단. (초청 강연) 2023 세계작가와의 대화: 「우리 안의 동물성」(The Animal in You)(2023.06.16.)
• 마텔, 얀. 『파이 이야기』.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2004.
• Martel, Yann. Life of Pi. Harvest Books, 2001.

 

박종성 충남대학교·영문학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에서 석사학위, 영국 런던대학교 퀸메리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2006), 『영문학 인사이트』(2021), 『좋은 영어, 문체와 수사』(2023), 『탈구조주의, 10가지 시각』(2023)이 있다. 공역서로는 『탈식민주의 길잡이』(2003), 『문화코드, 어떻게 읽을 것인가?』(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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