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분야에 대한 정부 지원 확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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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에 대한 정부 지원 확대해야
  • 김범수 편집기획위원/서울대 자유전공학부·정치학
  • 승인 2023.09.1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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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칼럼]

최근 우리나라 인문사회 학문 생태계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돈이 안 되는’ 기초학문과 순수학문 분야는 그야말로 고사(枯死) 직전이다. 대학과 국책 연구기관 등에서 관련 분야 일자리가 줄어들다 보니 박사학위를 받고도 수년째 갈 곳이 없어 고생하는 연구자가 부지기수이며, 새로 충원되는 신진 연구자의 숫자도 과거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런 상태로 10~20년이 지나면 학문 생태계 자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우선 학문 생태계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대학이 인구절벽과 학령인구 감소로 존폐 위기에 처하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고 취업이 잘 안 되는 인문사회계열 학과가 대학구조조정의 1순위가 되고 있다. 실제로 대학 위기가 현실화된 지난 몇 년 사이 지역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소재 대학에서조차 인문사회계열 학과의 통폐합과 폐과가 이어지고 있다. 2022년 9월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강득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아 발표한 ‘서울 소재 대학 학과 통폐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서울 소재 대학에서 인문사회계열 학과가 17개 사라진 반면 공학계열 학과는 23개가 신설되었다. 특히 어문계열 학과를 다수 운영 중인 한국외국어대학의 경우 2022년부터 통번역대학 4개 학과와 국제지역대학 4개 학과의 모집을 중단하고 대신 해당 인원을 글로벌자유전공으로 이월해 모집하는 방식으로 학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학과 통폐합과 폐과가 이어지는 가운데 인문사회계열 대학 입학 정원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인문사회계열 대학 입학 정원은 2013년 13만 3,215명에서 2022년 10만 6,692명으로 26,523명 정도 줄어 들었다. 인문사회계열 1개 학과의 입학 정원을 대략 30명으로 본다면 지난 10년 사이 전국에서 약 900여개에 달하는 인문사회계열 학과가 사라진 셈이다. 

이처럼 지난 몇 년 사이 학과 통폐합과 폐과, 정원 감축이 이어지면서 인문사회계열 대학 전임교원의 숫자도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 소속 국가교육통계센터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따르면, 경영·경제와 법학을 제외한 인문사회계열 일반대학 전임교원 숫자는 2013년 14,847명에서 2023년 14,300명으로 약 500명 정도 줄어들었다. 통계상으로는 별로 줄어든 것 같지 않지만 최근 대부분의 사립대학에서 새로 충원되는 전임교원의 상당수가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임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인문사회계열 가운데 응용학문 분야에서는 전임교원 숫자가 일정 수준 유지되거나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기초학문과 순수학문 분야에서 줄어든 정년트랙 전임교원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필자의 전공 분야인 정치이론·사상 분야의 경우 대학에 재직 중인 정년트랙 전임교수가 퇴임할 경우 아예 교원 TO 자체를 없애거나, 충원하더라도 다른 분야로 충원하거나 신분이 불안정한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으로 충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래저래 인문사회계열 기초학문과 순수학문 분야에서 일하는 연구자들에게는 우울한 소식뿐이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대학원생 숫자도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학교의 경우만 하더라도 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의 일부 학과는 몇 년째 대학원 입학 정원 채우기도 버거운 실정이다. 박사과정의 경우 수년째 미달이다. 짧게는 5~6년, 길게는 10년 동안 학업에 전념해 박사학위를 받아봤자 갈 수 있는 일자리라고는 연봉 1~2천만 원짜리 시간강사 자리나 연봉 3~4천만 원짜리 비정년트랙 (비)전임교원 자리밖에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계속 공부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연봉이 2천500만 원에 육박하는데 누가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를 받으려 하겠는가?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이러한 인문사회 분야의 위기를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과거 ‘잘 나가던’ 시절의 기억 때문에 학계의 자성과 대학의 변화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 사회 구조 변화와 함께 일정 수준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위기 상황은 너무 과도하다. 이제 막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은 연구자들에게 최저임금 수준에 불과한 월급을 주면서 대학의 온갖 행정과 강의를 떠맡기는 ‘관행’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유지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 학문 생태계 전반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자연 생태계에서 생물 다양성은 생태계의 건강과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생명의 그물망’ 역할을 수행한다. 거미줄의 줄이 한두 개씩 끊어지면 전체 거미줄이 점점 약해지는 것처럼 동식물 종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생명의 그물망’에도 구멍이 생기고 균형이 무너져 전체 생태계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학문 생태계 또한 지속 가능한 건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문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인기 있고 시장의 수요가 몰리는 학문 분야만 살아남는다면 결국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져 전체 생태계가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고 ‘돈이 안 되는’ 분야라 하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지원해 주어야 할 이유이다. 정부가 앞장서 인문사회 분야 학문 생태계 발전을 위한 종합대책을 세우고 기초학문과 순수학문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아마도 ‘인문사회학술기본법’ 제정이 그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김범수 편집기획위원/서울대 자유전공학부·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후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0년부터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학부장과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한 나를 지켜줄 7가지 정의론』(아카넷, 2022), 『평화학이란 무엇인가: 계보와 쟁점』(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2, 공저), 『한일관계 갈등을 넘어 화해로』(박문사, 2021, 공저), 『인권의 정치사상: 현대 인권 담론의 쟁점과 전망』(이학사, 2010, 공저) 등의 저서가 있으며, 정의, 인권, 평화, 민족주의 등 현대정치이론의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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