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낳은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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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낳은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9.10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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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 이후의 경제철학: ‘좋은 삶’을 원한다면 어떤 경제를 선택해야 하는가 | 홍기빈 지음 | EBS BOOKS | 276쪽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위기, 곧 생태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할 경제생활이 도리어 우리를 허무와 고독과 불안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파국을 눈 뜨고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 ‘지구상의 가장 한심한 동물’로 전락한 상황이 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자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제 다른 선택이 없음을 강조한다. 

지금의 지구적 산업문명은 결코 ‘지속 가능한’ 틀이 아니며, 그 근간이 되는 경제생활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세속 종교를 철폐하고, 오염되고 더럽혀진 인간의 이미지를 회복해 새로운 경제철학과 새로운 경제생활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요컨대 “경제생활이 우리를 허무와 고독과 불안으로 밀어 넣도록 짜여져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경제생활의 조직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처한 수많은 위기 속에서 두 가지에 특히 주목한다. 그것은 생태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다. 이는 지난 30년간의 산업문명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현상이기에 그렇다. 생태 위기는 산업문명의 지속가능성은 물론, 인간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생명 영역(biosphere) 전체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한 많은 경고의 목소리와 해법이 제시되고 있지만 정작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지금 우리 경제생활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는 대부분 회피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계속 성장하고, 계속 소비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경제성장은 우리 마음과 의식 속에 하나의 세속 종교와 같이 절대적인 목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는 어디까지나 20세기 후반 이후의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현상이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경제학의 주된 관심사는 성장이 아닌 ‘균형(equilibrium)’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무한의 소비 팽창이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이제는 으뜸가는 미덕이 되었고, 이를 가능케 하는 무한의 경제성장은 절대적인 ‘공공선(common good)’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지금 우리의 경제생활의 틀이 세 층위의 위기에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태 위기를 낳고 있으며,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낳고 있고, 셋째는 개인의 삶과 마음의 차원에서 허무와 고독과 불안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의 틀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자연과의 관계를 망치고,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고, 나 자신과의 관계를 망치는 이런 삶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저자는 결국 위기에 휩싸인 지구적 산업문명의 상태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게 만들고, 만족스럽지 못한 경제생활에 대해서도 그저 체념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근원이 세속 종교가 된 경제학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허무와 고독과 불안으로 몰아넣는 경제생활의 틀에서 끄집어내 마음과 몸으로 움직이는 활기찬 인간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여기서 아주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이 정말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일까?’라는 의문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가 근대과학의 함정으로 지적했던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를 소환한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도 인간이 지닌 몇 가지 측면을 가지고 경제학자들이 경제 이론을 구성하기 위해 얽어놓은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학과 경제사상의 역사가 이러한 ‘경제적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전개되지만은 않았다. 저자는 자기이익에 근거하여 최대의 쾌락과 최소의 고통을 번개같이 계산하여 선택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랑하고 꿈꾸고 관계를 맺고 절망을 극복하면서 경제활동을 해온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아 경제 이론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던 존 러스킨, 소스타인 베블런, 칼 폴라니, 칼 윌리엄 캅 같은 경제학자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한다.

다시 저자는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한다. 거의 모든 경제학 교과서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며, 주어진 수단은 항상 부족하다. 이러한 ‘희소성(scarcity)’의 조건 아래에서 들어가는 노력 및 희생을 최소화하고 얻을 수 있는 이익과 기쁨을 최대화하는 방식을 우리는 경제라고 한다”라는 문구. 문제는 ‘사람의 욕망은 정말 무한한가’이다. 저자는 욕망의 종류는 개개인의 다양성만큼 무한히 많으며,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이러한 명제에 의문이 생긴다고 말한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라는 명제는 인간 욕망의 모든 복잡한 차원을 뭉그러뜨려버림으로써 인생의 의미가 담긴 ‘좋은 삶’이라는 것을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소비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결국 존재는 물질과 정보라는 두 가지의 흐름으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21세기의 ‘경제적 인간’은 노동이라는 상품을 넘어 ‘인적 자본(human capital)’으로 진화했다. 인적 자본들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자신의 자본 가치를 높여야 하며, 거기에 도움이 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은 스스로 ‘기능’이 되어버리고, 관계는 ‘기능적 관계’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비단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관계, 심지어 정서적·성적인 내밀한 관계에 있어서도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투쟁 영역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인간 사회에서, 특히 근대 이후의 산업문명에서 인간은 이렇게 ‘기능’으로 환원되어 서로 경쟁하는 알갱이 개인들로 파편화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는 그 대안을 모색했던 경제학자, 사상가, 실천가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19세기, 산업혁명이 영국과 프랑스, 독일로 전파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산업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을 조직하는 인간의 관계가 반드시 무한한 경쟁과 개인의 파편화로 이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다. 이들은 모두 산업문명의 대안적 조직 원리로서 ‘협동’을 이야기했다. 퇴니스는 ‘동지사회’를, 프루동은 ‘상호주의’를, 오언은 ‘협동’을 내세웠으며 현실 속에 적용하며 실천해 나갔다. 더불어 저자는 경쟁 대신 협동을 선택한 ‘플랫폼 협동조합’, ‘동료생산/커먼즈’, ‘연대 경제’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는 고독에서 벗어나려면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함께 모였을 때는 함께 일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리고 그 일이 모두가 함께 원하고 꿈꾸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일일 때 더욱 효과적이다. 경제활동 본연의 모습은 바로 ‘함께 도우며 일하는 것’임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협동을 원리로 삼는 경제활동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서야 고독은 줄어들거나 소멸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위기만 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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