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의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법원 판결의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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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의 명예훼손 소송에 대한 법원 판결의 함의
  • 이승선 충남대·언론학
  • 승인 2023.09.0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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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공인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이 꼭 왜바람 같다. 상대가 언론이든 여염에 사는 백성이든 가리지 않고 자발없이 들이받는다. 자발적으로 공적 영역에 진입한 전면적 공인들이 오히려 소송에 앞장서고 있다. 얼마 전 수도권의 한 시의회 의원이 행정 포털 게시판에 글을 쓴 시청 공무원을 명예훼손과 모욕죄로 처벌해 달라며 고소했다. 시청 공무원노조는 공인에 대한 비판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는 처사라며 시의원을 규탄했다. 비단 시의회 의원만이 아니다. 최근 안동시장은 ○○당 지역위원회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측근의 투기 의혹을 해명하라는 현수막을 문제 삼았다. 김영환 충북도지사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충북지역 기자가 경찰에 고발됐다. 고발인은 충북도청 대변인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명예를 훼손한 죄로 기소된 기자에게 공고기각 판결이 선고됐다. 오 시장이 처벌불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오 시장과 방송인 김어준이 밀약을 맺었다고 기자가 유튜브 방송을 하자 시장은 그를 고소했었다. 

정치권의 공인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도 줄을 이었다. 김남국 국회의원은 코인 거래 의혹을 제기한 하태경 의원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국민의힘 김성원 의원, 장예찬 청년 최고위원도 김남국 의원의 명예를 훼손한 죄로 고소당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 박영훈 청년미래연석회의 부의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김건희 여사의 에코백에 샤넬 명품이 담겼다고 발언한 것을 문제 삼았다. 샤넬이 아니라 에르메스라는 말이 돌았다. 작년 9월 국민의힘은 MBC 사장과 보도국장, 기자 등 4명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비속어 논란 때 거짓 자막을 입혀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방송사고로 인해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YTN 임직원을 형사 고소했다. 며칠 후 다른 이유로 YTN 사장과 임직원에게 5억 원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걸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대변인과 홍보수석을 지냈다. 명예훼손죄로 여러 사람을 고소한 그에게 ‘고소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대통령 소속인 방송통신위원회는 KBS 이사 추천 및 감사 임명, MBC 방문진 이사와 감사 임명, EBS 사장·이사·감사 임명, 지상파방송의 재허가를 담당한다. 또 종편과 YTN 같은 보도전문채널의 재승인권도 행사한다. 막강한 기구다. 한편, 대통령실은 천공의 관저 개입 의혹을 보도한 김종대 의원과 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 그리고 언론사 기자들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의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군사법원은 청구를 기각했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한국의 명예훼손죄는 기이하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명예훼손죄 폐지를 촉구해 왔다. 명예훼손 소송의 천국이라는 영국도 2010년 형사상 명예훼손죄를 폐지했다. 우리와 명예훼손법 구조가 유사한 일본의 경우 명예훼손을 친고죄로 다루고 있다. 충성스러워 보이려는 측근의 ‘고발장’ 뒤에 비겁하게 숨지 말고, 지키고 회복해야 할 명예가 있거든 떳떳하게 직접 ‘고소장’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한국 사정은 다르다. 헌법재판소는 2021년 2~4월에 걸쳐 명예훼손죄 규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진실 적시, 허위 사실 적시, 비방할 목적의 명예훼손죄 모두가 위헌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반의사불벌의 죄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규정도 위헌이 아니라고 확인했다. 권력 작용에 대한 언론의 감시와 비판을 겁박하기 위해 맹목의 측근들이 요령껏 벌일 명예훼손죄 ‘고발’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어렵게 되었다. 입법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거나 친고죄로 바꿀 가능성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 법원이 공인에 대한 언론과 시민의 명예훼손 책임을 엄격히 제한하는 판결을 선고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형법’은 명예훼손을 했더라도 진실하고 공공성이 있을 때 위법성을 조각하는 규정을 두었다. 1988년 대법원은 진실성의 입증이 없더라도 취재·보도할 당시 언론이 진실이라고 믿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역시 명예훼손의 위법성을 조각하는 법리를 도입했다. 2002년 대법원은 공인의 명예훼손은 일반 사인의 그것과 달리 보아야 한다는 ‘공적 인물’ 법리를 수용했다. 명예훼손의 내용이 공적인지 아니면 사적인지 달리 취급해야 한다고도 판단했다. 2003년부터는 특별히 공직자나 공인의 도덕성이나 청렴성, 업무수행의 정당성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가 공직자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웬만하면 책임을 묻지 않도록 했다. 이른바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것이 아닌 한” 쉽게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해 왔다.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을 갖추었더라도 여론 형성과 민주주의의 균형을 위해 쓸모가 있는 공정한 비판이라면 형사처벌을 지양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최소한의 양식을 가진 언론인이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형사 처벌받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대법원은 2018년 ‘종북’이나 ‘주사파’라는 표현을 명예훼손보다는 의견표명의 모욕적 언사로 볼 수 있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공인이론이 피해자의 지위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공론의 장에 진입한 전면적 공적 인물의 경우 자신에 대한 비판을 사법적 응징이 아니라 해명과 재반박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공인인 피해자를 종북, 주사파로 공격한 것이 명예훼손이라는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에 환송했다. 2021년 6월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죄로 세월호 참사 공동대책위원장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피고인이 ‘보톡스’나 ‘마약’과 같은 표현을 사용해 기자회견을 했지만, 이는 명예훼손의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과정에서 제기한 의혹이라고 보았다. 국가기관인 대통령의 직무수행이 적정한가를 비판하는 내용은 표현의 자유가 특히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2021년 9월 대법원은 문재인 전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한 표현이 허위 사실 명예훼손이라고 판결한 원심을 파기했다. 고영주 전 방문진 이사장의 의견표명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무죄 취지를 담아 서울중앙지법에 돌려보냈고, 서울고법의 파기환송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같은 사건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를 인용한 원심도 파기 환송했다. 2022년 대법원은 고영주 이사장을 ‘철면피’, ‘파렴치’, ‘양두구육’, ‘극우 부패 세력’으로 공격한 한 방송인의 발언은 모욕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고 이사장의 공적 활동에 대한 의견표명이라고 보고, 모욕죄를 인정한 원심을 파기해 서울서부지법에 환송했다. 표현이 다소 모욕적이긴 하지만 공인의 공적 행위에 대한 비판의 일부이므로 그 언사를 견디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이후 대법원은 명예훼손의 위법성 조각 요소인 ‘공공의 이익’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 표현 내용이 사회 일반의 일부 이익에 관련되었을 뿐이라도 다른 일반인과 공동생활과 관련한 것이라면 공익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 개인에 관한 것이더라도 공공의 이익과 관련이 없다고 배제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의 사회적 활동과 사회적 영향력을 헤아려 판단해야 한다며 공공성의 영역을 확대했다. 잘 알다시피 명예훼손 소송에서 공익성이 인정되면 ‘비방할 목적’은 부정되므로, 온라인상의 사이버 명예훼손죄로 발언자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 법리가 이러한데도 공인의 공적 활동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명예훼손죄로 처벌하려는 안팎의 부단한 시도는 자유민주주의의 운영원리로 적절치 않다. 특히 자발적으로 공적 영역에 진입한 전면적 공인들은 2021년 9월 판결에서 나온 대법원의 판시를 새겨야 한다. 대법원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다른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비판이나 불이익을 무릅쓰고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의견은 창의성의 발현이고, 잘 차려진 풍요로운 밥상과 같은 것이라고 대법원은 일갈했다. 

 

이승선 충남대·언론학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2000년 법학과 1학년에 들어갔다. 석·박사 과정을 거쳐 ‘헌법재판과 표현의 자유’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헌법재판연구원 방문 교수,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한국언론법학회장을 역임했다. 표현의 자유를 확장하거나 구속하는 재판에 학술적 관심이 많다. 기록은 시원치 않으나 마라톤을 완주하고 지리산 걷기를 좋아하며, 간혹 사람 숫자가 부족한 학생들이 농구 시합에 끼워주면 운 좋게 슛을 성공시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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