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왔는지조차 모르게 끝난 나의 드라마 - 아이유, 여성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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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는지조차 모르게 끝난 나의 드라마 - 아이유, 여성을 노래하다
  • 김광식 서울대·인지문화철학
  • 승인 2023.08.27 0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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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식 교수의 〈음악과 철학 사이〉

 

 

[리뷰] 아이리스 영의 〈차이의 정치와 정의〉로 본 아이유의 〈드라마〉


“나도 한때는 그이의 손을 잡고 / 내가 온 세상 주인공이 된 듯
꽃송이의 꽃잎 하나하나까지 / 모두 날 위해 피어났지

올림픽대로 뚝섬 유원지 / 서촌 골목골목 예쁜 식당
나를 휘청거리게 만든 / 주옥같은 대사들 (...)

언제부턴가 급격하게 / 단조로 바뀌던 배경음악
조명이 꺼진 세트장에 / 혼자 남겨진 나는 /

단역을 맡은 그냥 평범한 여자 / 꽃도 하늘도 한강도 거짓말
나의 드라마는 또 이렇게 끝나 / 나왔는지조차 모르게 / 끝났는지조차 모르게”


아이유가 부른 노래 <드라마>다.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의 비극적 드라마다. ‘레이디 퍼스트’라고 하면, 여성을 위해 남성이 차 문을 먼저 열어주고, 코트를 먼저 받아 걸어주고, 식탁의 의자를 앉기 편하게 먼저 빼주고, 포도주를 먼저 따라주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중세의 기사나 영국 신사가 교양이란 이름으로 갖추려 했던 여성에 대한 예절 말이다. ‘남존여비’를 내세운 조선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이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여성 천국의 시대가 된 것일까? 아니다. 조명이 꺼지면 ‘레이디 퍼스트’라는 주옥같은 대사들이 넘치는 화려한 드라마는 사라지고, 나왔는지조차 모르게 끝났는지조차 모르게 끝나는 비극적 드라마만 남는다.

이러한 비극적 드라마는 영화 <더 와이프>에서도 펼쳐진다. 배경은 1960년대 미국. 촉망받는 젊은 여성 작가는 어느 날 나이 든 여성 작가로부터 여성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니 글을 쓰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그 뒤 그녀는 지도 교수와 사랑에 빠져 글쓰기를 그만두고 결혼한다. 남자는 아이디어와 이야기 구성 능력은 뛰어나지만 글쓰기 능력이 모자라 출판이 거부된다. 여자는 상심한 남자를 도와 소설을 고쳐 쓰고, 그 소설은 크게 성공한다. 그 뒤 여자는 남자를 대신하여 소설을 쓰고, 그 소설들은 크게 성공하여 마침내 남자는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여자는 한편으로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시상식 날 여자는 남자에게 수상소감을 말할 때 자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 한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모든 게 아내 덕분이라 말한다. 그 일로 둘은 크게 다투고 남자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숨을 거둔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필 의혹을 캐던 기자에게 여자는 남자가 훌륭한 작가라고 말한다.

미국의 여성 철학자 아이리스 영(Iris M. Young)은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직접적인 억압 행위와 사회 구조를 통한 간접적인 억압을 나눈다. 영화 속 남자는 여자에게 대필을 강요하지 않았다. 남자를 사랑한 여자가 자발적으로 도운 거다. 시상식에서 모든 게 여자의 덕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남자는 여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남자가 여자를 직접 억압한 적은 없었다. 바람피우는 것만 빼면(?), 남자는 여자에게 늘 자상한 사랑스러운 좋은 남편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여자에게 화를 내게 만든 것은 남자라기보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구조 자체였다.

‘여성 안심 귀갓길’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신림 둘레길 여성 강간 살인 사건으로 ‘여성 안심 귀갓길 폐지’를 자랑했던 남자 구의원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는 작년 자기 유튜브에서 “여성 안심 귀갓길 사업으로 남성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 있기에, “여성 안심 귀갓길 예산을 전액 삭감해 이 예산으로 안심 골목길 사업을 증액했다”라고 말했다. 구의회 누리집에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 ‘피해망상’과 같은 말로 여성 혐오를 부추기고 여성 안심 귀갓길을 폐지하여 여성 강간 살인 사건이 일어나게 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수많은 비난 글이 올라왔다. 그는 “여성 안심 귀갓길 대신 (...) 안심 골목길 사업이 치안에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며, “광인처럼 날뛰는 성 특권 파시즘 세력과 타협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라고 맞받았다.

‘여성 안심 귀갓길’ 사업과 ‘안심 골목길’ 사업은 어떻게 다를까? ‘여성’이라는 말이 있고 없고가 어떻게 다를까? 어느 쪽이 더 옳을까?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울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사회집단 사이의 다름에 더 주목해야 할까, 다름보다 같음에 더 주목해야 할까? 아이리스 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집단이 억압을 받는다면, (...) 사회는 그 집단의 차이를 인정하고 주목해야 한다.”

 - 아이리스 영, <차이의 정치와 정의>

 

                                      Iris Marion Young (1949년 1월 2일 – 2006년 8월 1일)

왜일까? 사회집단 사이의 다름보다 같음에 더 주목하면 사회집단 사이의 구조를 통한 억압은 감추어져 없어지지 않는다. 개인이나 집단의 직접적인 억압 행위는 눈에 잘 띄지만, 사회집단 사이의 구조를 통한 간접적인 억압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더 와이프>에서 모든 게 아내 덕분이라는 말에 여자가 분노한 까닭을 찾는 게 쉽지 않다.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여자가 그 말에 그렇게 분노할 만한 남편의 직접적인 억압 행위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이리스 영은 억압의 한 모습인 폭력을 직접적 폭력 행위와 사회 구조를 통한 간접적 폭력으로 나눈다.

폭력을 억압으로 만드는 것은 직접적 폭력 행위가 아니라, 그 폭력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사회 환경이다. 억압하는 폭력은 개인적 행위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사회적 행위다. 어떤 집단에 속한 이들은 이유 없이 언제라도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억압하는 폭력이 체계적이거나 구조적이라고 하는 까닭은 어떤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이 행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억압은 사회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억압받는 집단의 민주적 참여를 구조적으로 배제하는 구조적 지배를 통해 유지되거나 강화된다. 그래서 아이리스 영은 이러한 구조적 지배나 억압을 없애기 위해 사회집단 사이의 차이에 더 주목하여 억압받는 집단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고 적극적으로 차별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꽃송이의 꽃잎 하나하나까지 모두 널 위해 피어났다며 여성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레이디 퍼스트’라는 주옥같은 대사들이 넘쳐나지만, 조명이 꺼지면 그러한 화려한 드라마는 사라지고 나왔는지조차 모르게 끝났는지조차 모르게 끝나는 비극적 드라마만 남는다. 여성은 사회의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여성이라는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라도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차 문을 먼저 열어주고, 포도주를 먼저 따라주는 것 못지않게 구조적인 억압이나 폭력에 더 주목하고 같음보다 다름에 더 주목하여 ‘안심 골목길’에 앞서 ‘여성 안심 귀갓길’을 만들자. 그래야 나왔는지조차 모르게 끝났는지조차 모르게 끝나는 비극적 드라마를 마침내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드라마는 또 이렇게 끝나
나왔는지조차 모르게 / 끝났는지조차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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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보다 같음에 더 주목하면!

 

김광식 서울대·인지문화철학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공과대학 과학·기술·철학과에서 인지문화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기초교육원에서 교양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인지과학의 성과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인지철학자이자, 여러 문화현상의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문화철학자이다. 저서로 『BTS와 철학하기』, 『행동지식』, 『김광석과 철학하기』, 『다시 민주주의다』(공저),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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