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재단이 후원한 3인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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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재단이 후원한 3인전 이야기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3.08.2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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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명 교수의 〈생활에세이〉

 

유령 재단인 달빛재단이 후원하는 세 사람 전시회가 더운 여름날에 열렸다. 이름하여 ‘달빛 아래’ 전. 이태 전에 달빛재단의 전시 후원금을 받았던 김해진 작가가 주도하고 또 다른 수혜자였던 한기호 작가가 참여하였다. 나도 끼었다. 장난삼아 이 두 사람을 달빛재단의 이사로 임명한다고 하였더니, 안내장에도 그 직책을 집어넣자고 하여 총무이사, 섭외이사 이렇게 넣었다. 나는 물론 이사장이다. 한기호 섭외이사는 ‘머슴’ 이사 겸직인데 차마 그 명칭은 공개적으로 쓸 수가 없었다. 실제 업무는 그것이었지만 말이다.

전시 장소는 ‘갤러리 비’라는 곳이었는데 아담하고 깨끗하여 그럴듯하였다. 위치도 서촌 끝자락이라 전시회의 분위기를 살려주었다. 한국에 회의차 다니러 온 인도네시아 문인들이 한국 주최측의 안내로 관광차 거닐다가 들어와서 한참 이야기하고 사진도 찍고 하였다. 

축하연에서는 김해진 작가의 지인이 예정에 없던 플루트 연주도 선보였다. 참여 인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흥은 있었다. 축하연을 보통 오프닝이라고 하는데 이는 개막식을 뜻할 것이다. 하지만 전시 시작하고 며칠 지나서 하는 축하연을 오프닝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악몽을 영어로 ‘나이트’메어라고 하는데 낮잠 자다 꾸는 악몽은 영어로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어떤 영어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와 같은 인생 난제로다.   

전시회를 열어봤자 누가 올 것이며 누가 살 것이며 언론에서 다루지도 않을 것이 뻔한데, 굳이 애쓸 필요가 있을까? 무명 작가의 딜레마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앞으로 화가로서 출세하기를 꿈꾸는 사람이야 용을 쓰고 노력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늙은 나에게는 더 현실적인 문제다. 하지만 전시를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이 재미있기도 하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전시장 자리를 지키던 김해진 작가에게서 카톡이 왔다. 내 그림이 여러 개 팔렸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었는데, 하나는 그 화랑의 실질적인 주인인 장부남이라는 노화백(한국청소년미술협회 이사장—유령 이사장 아니고 진짜 이사장이다.)이 샀고 다른 세 개를 김 작가 본인이 샀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화백은 사고 싶다고 했지 사겠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인데, 김 작가가 앞서나간 것이었다. 결국 그 장부남 화백의 그림 하나와 내 그림을 맞바꾸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내가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딸에게 “화가가 뭐지? 그림 그리면 화가 아닌가?”했더니 딸이 명답을 내놓았다. “그림을 팔아야 화가지!” 나는 그동안 그림을 여러 개 팔았지만 거의 전부 지인에게 판 것이었다. 이번에는 모르는 사람에게 팔았다고 좋아했는데 그냥 좋다가 말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림을 교환한 것도 판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현찰 대신 현물로 받은 게 다를 뿐이다. 돈 대신 쌀 가마니를 받았다고 안 판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강변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모르는 사람에게 그림을 팔았고, 드디어 화가가 되었다. 

지난 번에 소개한 적이 있지만, 달빛재단은 내가 이사장이 되고 싶어서 화가에게 소액을 후원하면서 갖다붙인 이름뿐인 재단이다. 이사장은 나이고 김해진이 총무이사이고 한기호가 머슴이사 겸 섭외이사이다. 장난 삼아 하고 있는 짓이지만, 이 짓이 당분간은 계속될 것 같다. 무명 작가들의 그림 전시회를 앞으로도 열 것 같고 그 비용을 후원할 것 같다는 말이다. 응원해 주실 필요는 없다. 괜히 돈만 더 들어가니까.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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