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침략하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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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침략하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다
  • 김백철 계명대·조선시대사
  • 승인 2023.08.2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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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사법품보』가 그린 왕정과 인간: 고종시대 근대사법체계 도입사 (김백철 지음, 아카넷, 772쪽, 2023.06)

 

한국 근대(혹은 개화)의 실제 내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서구제도의 수용과 근대는 반드시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근대 사법권 분화의 기원도 그리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국공법≫에서는 로마법을 ‘만국공법’의 예로 지칭하였으므로 서구의 국제표준이 반드시 근대적일 수 없었다. 또한 유럽·일본은 봉건제인 상태에서 중앙집권국가를 근대에 처음 만들었으므로 ‘국가’·‘국민’·‘중앙집권화’이 ‘근대’의 요소였으나 한국·중국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개화관료들은 일본의 무조건적인 서구제도 수용에 비판적이었고, 근대국가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제도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였다. 

반면에 일본제국의 ‘자주-독립’이나 ‘문명-개화’는 한국을 정치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수사였다. 갑오개혁은 일본제국이 도성과 궁궐을 점령한 상태에서 추진하였으므로 폐정개혁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제도가 새로운 이름으로 공포되었으나 실제 운영은 전통시대와 다르지 않거나 개혁을 공포하고도 당분간 유지되었다. 일본제국은 청일전쟁으로 한반도뿐 아니라 요동반도·산동반도·대만까지 손에 넣었으나 급성장을 경계한 서구열강의 간섭으로 조선·대만의 영유권만 인정받았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국왕은 경복궁의 경비권한을 일본제국의 지휘를 받는 친일내각으로부터 회수하려 하였고, 왕비 역시 일본제국의 뇌물을 거절하고 삼국간섭 이후의 국제질서를 활용하여 대일견제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일본제국은 왕비를 시해해서 보복하였고 고종은 두 차례나 궁궐 탈출을 감행하여 포로상태에서 벗어났다.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중앙과 지방, 상층과 하층의 대대적 통합운동을 벌이면서 독립문‧≪독립신문≫‧독립협회 등이 만들어졌으나 일본제국은 모처럼 통합된 국론을 분열시키고자 민권운동을 자극했다. 외세간섭과 이권침탈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시민운동을 전개하도록 했고, 그 핵심대상은 러시아였다. 일본제국의 독립론은 대륙국가인 청이나 러시아와 연대를 좌절시키는 데 활용되었다. 청에 대해서는 사대주의에 대항하는 독립론으로, 러시아에 대해서는 외세이권침탈에 대항하는 민권운동으로 이념화했다. 

이러한 절대적으로 불리한 국내외 여건 속에서 대외적으로 자주독립을 지키고 대내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처음 통상을 시작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분야별로 과제를 설정하여 해외문물을 조사하고 국내에 도입가능 여부를 면밀히 검토해왔다. 그중 사법분야도 점진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불행히도 일본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진행된 갑오개혁을 필두로 근대제도 개편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을 추진하면서 갑오개혁기의 일본제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된 제도는 폐지하였고, 일본제국이 쓰지 못하게 한 제국호칭은 부활시켰으며, 그외 보편적인 개화정책은 유지했다. 오히려 일본제국이 <을사늑약>으로 통감정치를 시작하면서 구래의 근대적 사법제도는 종언을 맞이하였다. 근대적 형정은 대한제국의 복고정책으로 중단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국권약탈 이후 좌절되었고 식민지체제로 전환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선택한 사법개혁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중앙집권적 사법체계를 한 단계 강화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실제 ≪사법품보≫의 내용과 대조해보면 지방재판소는 사실상 법부대신의 철저한 감독 아래에 귀속되었다. 제왕의 친정체제보다는 이른바 입헌군주제 모델이 상당 부분 수용되었다. 
둘째, 지방재판소의 감형권한 명문화이다. 특히 <형률명례>(1896) 단계의 참작감량은 약 10여 년간 법부의 감독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형법대전≫(1905)에서는 세부조건하 감형으로 명시됨으로써 죄형법정주의가 재천명되었다. 이는 오늘날 참작감량보다 진일보된 감형규정이다. 
셋째, 사법제도의 분리·독립이다. 판사·검사·변호사·경찰 등을 독립시켜 제도화하였다. 
넷째, 사법체계 변동이다. 갑오개혁기 단편적인 법령은 광무개혁에 이르러 법제도 전반의 재구축으로 진화하였다. 한편으로 전-예-율 삼법체계에서 마지막으로 율의 범위도 ≪형법대전≫이 마련됨으로써 조선의 아국법체계가 완성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사법체계의 도입시도로 군법(≪육군법률≫)과 형법(≪형법대전≫)을 축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섯째, 형벌제도가 개편되었다. 연좌제·장형·참형·유형·부가형(태형+징역형) 등이 점차 폐지되었다. 또한 감옥의 기능은 미수범의 수용에서 징역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방식이 바뀌었다. 

고종연간 민‧형사사건은 전통적인 형태와 새로운 범죄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전통적인 범죄는 절도에서 강도에 이르는 전형적인 도적행위이다. 여기에 사기·살인·성폭력·산송 등 사건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19세기 후반 종래와 다른 범죄 양상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전통시대와 비슷한 유형의 범죄일지라도 그 죄질이 더 나빠졌다. 예컨대 19세기부터 무장강도가 점차 대규모로 퍼지면서 인신에 대한 약탈까지 늘어나는 추세가 확인되고 있다. 둘째, 개항기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범죄도 등장하였다. 개항 이후 외세와 연관된 범죄가 양산되었다. 셋째, 민권운동을 빙자한 사익추구 현상이 나타났다. 갑오~광무개혁을 전후로 새로운 재정정책이 펼쳐지자, 중앙과 지방 사이에 정책집행에 소요되는 시간과 현지사정의 차이로 인한 불협화음이 집단민원으로 제기되었다. 이는 조정에서 조병갑사건(동학농민운동 및 청일전쟁 발발)에 대한 교훈으로 민의 불만을 없애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종 후반 사법개혁은 내우외환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서구가 뒤늦게 만들어낸 중앙집권국가의 요소 속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법제도와 유사한 부분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동시에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새로운 사법요소도 선택적으로 수용해야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보편의 기존범죄는 전통적인 사법체계를 재정비하여 대응하고, 개항 이후 외국인이 국내외 들어와서 발생하는 다양한 신규범죄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했다. 법치주의 원칙을 천명하면서도 민심이 조정을 떠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대한제국기 ‘구본신참’의 구호하에 근대 사법체계 구축에도 전통·개화를 두루 고려하여 정책입안을 해나가야 했다. 여기에는 황제가 변함 없이 개혁을 지지하고, 중앙의 관료집단과 지방의 목민관들이 주체로서 소임을 다하며, 백성이 새로운 사법행정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상당히 주요했다.


김백철 계명대·조선시대사

계명대 사학과 교수. 대표저서로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2010), ≪두 얼굴의 영조≫(2014), ≪법치국가 조선의 탄생≫(2016), ≪탕평시대 법치주의 유산≫(2016), ≪정조의 군주상≫(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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