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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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쉬어라
  • 이상룡 논설위원/부산대학교·철학
  • 승인 2023.08.2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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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칼럼]

고타마 싯달타는 생로병사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고라는 것을 깨닫고 붓다가 되었다. 누구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를 깨닫게 되면 대자대비하게 된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적을 행하였는데, 앉은뱅이가 걸으며, 벙어리가 말하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았다. 그들의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붓다와 예수의 관심사는 아픈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 대척점에 한국 사회가 있다.

아파도 일해라. 일이 지상명령인 사회에서 아픈 것은 결함이다. 심지어 도덕적 결함이기까지 하다. 아파서 일을 나오지 않으면 그 자리를 누군가 메꿔야 하는데, 이를 민폐로 받아들인다. 물론 아프면 쉬라고 한다. 그런데 아픈 사람이 일터의 동료거나 부하라면? 아프면 쉬라는 말은 한국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말이다. 아파도 학교에 가야만 했고, 개근상을 타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지만, 돈도 없고 기술도 없고 자원도 없고, 있는 건 몸뚱이밖에 없었으니 그 몸을 일하는 몸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아프더라도 더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서, 약 사 먹고, 그래도 안 되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파도 쉬지 못하고 일을 했다. 누군가가 아프면 그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그를 보살피고자 한다. 그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다. 상병수당과 유급병가가 없는 한국 사회는 그래서 여전히 사회가 아니다. 여기는 개인들이 없다. 조직만 있다. 여기는 사람이 없다. 조직을 지탱하는 도구만 있다. 문명의 첫 신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거릿 미드는 ‘1500년 된 인간 화석에서 나온 대퇴부 골절 흔적’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대퇴부 골절에서 회복하려면 6주가량이 걸리는데 그동안 누군가 그를 돌봤다는 것, 그를 대신해 사냥하고 음식을 가져다주었다는 것, 그것이 문명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근대화되지 않았다. 개인이 없다. 여기에는 국가만 덩그러니 있다. 그리고 그 국가는 공동체가 아니다. 아파서 쉬면 누군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 당연히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이를 민폐라고 생각하게 되면, 아픈 사람은 쉬지 못한다. 아파도 쉴 권리가 없는 그는 개인이 아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의 일을 대신하면서 이를 민폐라고 생각하는 그 누군가도 개인이 아니다. 그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아플 수 있기 때문에 아픈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 역시 여전히 개인이 아니다. 그 역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아프면 쉰다, 이것이 권리가 될 때 비로소 그는 개인이 된다. 사회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프면 쉬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몸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일하는 몸이 아니다. 우리의 몸은 사는 몸이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일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닌데,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드는 것은 우리를 노예로 부리고자 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고, 일을 하기 위해 건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무엇을 위해 아프면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프면 쉬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아프기 때문이다.

아프면 쉴 수 있게 해야 한다. 유급으로 하지 않으면 아파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유급병가는 얼른 건강을 되찾아서 열심히 일하라고 도입하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나도 아플 수 있기 때문에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냥 아프면 쉬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을 통상 사이코패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가장 지독한 사이코패스는 아파도 일하라는 자들 아닌가?

대학 강사에게는 병가라는 제도가 아예 없다. 아픈데도 교육열에 불타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강 시간을 잡는 일이 난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픔을 참고 수업하다 쓰러지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니 상당 기간 치료를 요하면 그냥 대학을 떠나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돈벌이를 포기해야 하고, 강사 경력의 단절을 각오해야 한다. “병가 좀 내겠습니다”, 대학 강사에겐 허용되지 않는 말이다. 그러니 대학 강사는 적어도 학기 중에는 아프면 안 된다. 아프지 않는 것, 그것은 대학 강사로서 반드시 갖춰야 하는 능력이다. 설령 아프더라도 수업이 없는 날을 잘 골라서 때마침 아파야 한다. 아프더라도 수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실해야 한다. 아파서 수업을 할 수 없다면? 그는 그만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강사가 된다. 그리고 그 도덕률은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조직에서 나온다.

강사들에게 유급병가를 허용하면 돈도 돈이지만 학사 운영에 차질이 생긴다고 한다. 병가를 내는 강사들이 많을 것이라고 한다. 악용하는 강사들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병가를 내려면 진단서를 내야 할 것이고, 보강의 의무도 있다. 아파서 신음하는 누군가를 보고 우리는 그가 진정으로 아픈지 의심하지 않는다. 곧장 달려가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치료한다. 아파서 수업할 수 없는 강사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학에는 그럴 돈이 없다? 돈이 얼마나 들건 유급으로 쉬게 해야 한다. 그럴 돈이 없는 대학이 무슨 교육을 하겠는가? 학생들한테 피해를 준다? 아파도 수업하는 사회와 아프면 쉬어버리는 사회, 어느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일까? 아파서 쉬는데도 이를 민폐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일은 해야 한다. 먹고살아야 하는 건 맞는데,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파서 일을 못 한 것이다. 예수는 아픈 자들에게 이적을 행했고, 부처는 병든 자들을 자비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이니까. 물론 우리는 늘 부처나 예수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때로는 부처가 된다. 아주 가끔은 예수가 된다. 그리고 더 자주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이상룡 논설위원/부산대학교·철학

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강사. 부산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대학 개혁, 특히 비정규교수의 노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비정규교수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다. 「의사소통과 일치」, 「해명·치료·언어투쟁」, 「비트겐슈타인 삶의 방식의 변경」, 「대학 구조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벼랑 끝 비정규교수」,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고용구조」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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