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적 불평등성과 존재론적 정동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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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 불평등성과 존재론적 정동정치
  • 나병철 한국교원대학교·한국현대소설
  • 승인 2023.08.1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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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말_ 『정동정치와 언택트 문학: 평등을 실천하는 정치와 문학』 (나병철 지음, 문예출판사, 560쪽, 2023.06)

 

근대 이후 계속 논란이 되어 온 불평등성의 문제는 21세기에 와서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오늘날의 금수저론과 세습 자본주의론이 암시하는 것은 사회 구조를 인식해도 불평등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자기 무력감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난관은 구조적 인식이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고착성에 있다. 21세기는 알튀세가 제기한 인식과 실천의 단절 문제가 사회문제의 난제로 전면에 대두된 시대이다.

이 책은 그런 미궁의 해결책으로 인식을 실천에 접합시키는 존재론적 정동정치에 대해 살펴봤다. 정동정치란 신체의 힘을 증진시키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능동적 실천을 말한다. 능동적 정동은 우리를 감성적으로 고양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비판적 이성을 증진시켜 실천력을 발휘하게 한다. 스피노자가 오직 능동적 정동만이 유해한 정동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좋은 정동이 최고의 이성과 결합해 실천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런 정동이 정치의 영역에서 부각된 것은 권력이 먼저 스피노자의 정동론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능동적 실천의 위축은 무의식과 정동마저 상품화한 신자유주의의 정동권력에 그 원인이 있다. 정동이 식민화되면 사람들은 자본이 만든 감성에 세뇌되어 타자를 혐오하며 사회모순의 해소를 위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날은 ‘자본이 가르쳐준 것만 보다가 자본이 만들어준 수의를 입고 죽는 시대’(이인휘)가 되었다. 정동정치는 그런 신자유주의의 선제적인 정동적 공격에 기습적으로 대항하는 지속적인 비정규전이다.

그처럼 정동정치는 정동 자본주의(그리고 인지 자본주의)가 대중의 지각체계를 조작하는 데에 대한 대응책으로 떠올랐다. 이 책의 새로운 관점은 지금의 정동권력의 핵심 기제를 타자의 추방으로 보고 그에 대한 실천적 대응을 모색하는 데 있다. 타자가 추방되면 혐오가 만연되고 90%들이 수동적 정동에 예속되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해도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자의 문제에 최초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는 자본주의가 자신을 해체할 무기를 들 사람들을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인식한 것은 프롤레타리아라는 자본주의의 타자였으며, 그는 자신을 해체할 사람들을 스스로 만든 자본주의의 증상(라캉)을 간파했던 셈이다.

증상이 정치적 반격이 되는 것은 타자의 정동적 호소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미시권력을 통해 우리에게 정동적 초청장을 보내는 타자를 추방했다. 타자의 추방은 마르크스가 미처 예견하지 못한 신자유주의라는 순수자본주의의 제2의 증상이다. 제2의 증상이란 타자와의 존재론적 교감의 상실, 즉 90%들이 수동적 정동에 예속되어 타자를 외면하고 정동적으로 쇠약해진 상황을 뜻한다. 자본주의가 계속 순도 높게 진행되면 하층민을 배제하며 아무 증상이 없는 조용한 세습자본주의를 만드는 제2의 증상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서 보듯이 타자를 궁지에 몰아넣는 제2의 증상 역시 노동자의 착취 이상으로 비합리적이다. 자본주의는 무증상의 증상을 통해 거리를 무력화했지만 『오징어 게임』의 스크린의 정동적 충격을 막지 못했다. 그 점에서 우리시대의 증상의 반격은 대중문화와 문학이 보여주는 존재론적 충격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마르크스와 월러스틴은 차별과 불평등성이 극단화되면 도처에서 유령이 출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시대에는 거리가 조용한 대신 스크린과 소설책에서 정동적 유령이 출현하고 있다. 정동적 유령이란 유토피아가 배반당한 상처로부터 나타난 강력한 감성적 반란의 신호이다. 『기생충』의 기생충, 『오징어 게임』의 깐부, 『버닝』의 나체, 그리고 『사하맨션』(조남주)과 『해피 아포 칼립스!』(백민석)의 좀비는 우리시대의 유령들이다. 이 정동적 유령들은 배반당한 유토피아를 심연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귀환의 소망의 응시이다. 우리는 그 위험한 응시를 증폭시켜 타자를 귀환시키고 연대를 부활하는 정동정치를 실행해야 한다.

정동권력의 시대는 코로나 바이러스 이상으로 정동적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대이다. 그로 인해 벌거벗은 얼굴을 상실한 채 떠도는 타자가 바로 정동적 유령이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이리아의 정치학은 사회적 타자들이 맨얼굴로 만나게 했다. 반면에 오늘날은 수동적 정동이 만연되어 아감벤이 말한 대로 ‘얼굴 없는 인간’의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는 타자의 회생과 연대의 부활을 위해 떨어진 채 다가서는 특별한 언택트 전략이 강조되어야 한다.

예컨대 『기생충』에서는 ‘냄새’라는 감성적 불평등성 때문에 인격적으로 평등하게 대면하며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러나 하층민 타자는 기생충으로 추방된 채 비밀리에 모스부호로 언택트 교신을 한다. 또한 『시그널』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월권을 행사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세상이 그려진다. 그런 중에 이재한과 박해영은 떨어진 채 무전교신을 하며 변화된 세상을 소망한다. 마찬가지로 『레몬』(권여선)에서는 보이지 않는 타자가 사건이 일어나면 범죄 혐의의 표적으로 떠오르는 사회가 그려진다. 그러나 ‘나’(다언)는 레몬 향기로 정동을 고양시키며 공장의 굉음 때문에 다가서지 못하는 타자를 동영상 찍듯이 심연에 각인시킨다. 지하 벙커의 모스부호, 비대면의 무전교신, 폭포수 같은 레몬 향기는 우리시대의 신무기이다. 현실에서 무력해진 사람들은 정동정치를 통해 능동성을 고양시키며 타자로부터 멀어진 채 다시 가까워져야 하는 것이다.

용산참사에서 세월호 사건에 이르는 과정은 그런 정동정치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용산참사에서는 아무도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서는 물밑으로 사라진 타자를 사람들이 은유와 시로 되돌아오게 만들고 있었다. 문학과 대중 매체의 정동정치가 능동적 정동을 고양시키며 배제된 타자를 꽃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이다.

그처럼 현장에서 벌거벗은 얼굴을 만나기 힘든 시대에는 문학과 대중문화, 다양한 매체의 담론을 통해 능동적 정동을 증폭시켜야 한다. 이 책은 정세랑, 정진영, 권여선, 한강, 장은진, 이재웅, 김탁환, 김초엽의 작품들을 통해 그런 정동정치의 과정을 살펴봤다. 우리시대는 지식인과 민중의 만남이 결렬되고 하층민과 중간층이 분열된 시대이다. 그런 시대에는 떨어진 채 다가서며 능동적 정동의 물결을 만들지 않으면 사람들의 연대는 회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등과 정의를 되찾기 위해 언택트로 무전을 하고 심연에서 타자의 동영상을 보며 레몬 향기가 쏟아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시대는 사상도 혁명도 책갈피로 숨어든 시대이다. 월러스틴은 사상의 신념을 잃고 길을 헤매는 시대를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상의 무력화는 시대의 운명이 아니라 정동권력과 제2의 증상에 원인이 있다. 사상가의 은거와 침묵을 초래한 ‘우리가 모르는 세계’ 뒤에는 타자의 추방과 정동의 식민화가 놓여 있다 정동이 식민화되면 차별과 불평등을 인식해도 사람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의 인식의 정치학은 신체에 힘을 부여하고 연대를 회생시키는 정동정치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서 정동정치는 사상 이후의 사상을 꿈꾼다. 정동적 무기력에 혼탁의 원인이 있는 사회에서는 더 강한 정동만이 이성을 회생시키며 난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정동정치는 인식과 실천을 결합해주며 책갈피의 사상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다. 오늘날에는 비판사상과 대항 헤게모니에 앞서 정동정치가 실천되어야만 ‘사상 이후의 사상’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나병철 한국교원대학교·한국현대소설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문학의 시각성과 보이지 않는 비밀》, 《친밀한 권력과 낯선 타자》, 《특이성의 문학과 제3의 시간》, 《소설이란 무엇인가》(공저), 《감성정치와 사랑의 미학》, 《미래 이후의 미학》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문학교육론》(제임스 그리블), 《프롤레타리아의 물결》(박선영), 《냉전시대 한국의 문학과 영화》(테드 휴즈), 《서비스 이코노미》(이진경), 《문화의 위치》(호미 바바)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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