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초기의 고전에서 찾은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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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의 고전에서 찾은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
  • 박승찬 가톨릭대·철학
  • 승인 2023.08.07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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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말하다_ 『신 앞에 선 인간: 중세의 위대한 유산, 철학과 종교의 첫 만남』 (박승찬 지음, 21세기북스, 264쪽, 2023.06)

 

필자는 1988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에서 중세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이후 우리나라 학계의 변화를 보고 놀랐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세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책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관심에 부응하여 필자도 다양한 방송과 여러 기관에서 초대를 받아 중세에 관한 편견을 깨기 위해 20여 년을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비민주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일들이 벌어지면, 여전히 ‘마치 중세 암흑기와 같다’라는 표현이 습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세는 과연 암흑기인가?

‘암흑기’라는 표현을 통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끝없는 공포, 광신주의와 타종교에 대한 편협성, 역병, 빈곤과 대량 학살로 인해 문화적이고 물질적으로 쇠퇴한 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 또는 교회의 권위가 인간의 이성을 속박하고 뛰어난 지성인들이 쓸모없는 신학 연구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던 ‘지성적 불모’의 시대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한때 이러한 편견에 따라, 철학 교육에서도 중세 철학을 아예 생략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이런 중세에 대한 편견의 직접적인 원인은 중세와 근대의 사이에 놓인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자’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체험했던 15세기 이후 쇠퇴한 스콜라 철학에서는 지나치게 세분화된 개념들에 관한 논쟁들이 오히려 학문의 중요한 발전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를 체험했던 인본주의자들은 중세 사상과 문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자신들을 고대 사상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자처했다. 또한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새롭게 개발된 실험 방법은 중세 자연학 이론들의 많은 오류를 밝혀냈다. 이를 토대로 중세의 자연관에 대해 대대적인 비판이 가해졌다. 이렇게 근대 과학의 발전은 중세에 대한 편견을 더욱 가속화했고, 이는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편견을 집대성했던 19세기 독일 역사가들의 견해가 일본의 역사가들에게 수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암흑기’라는 표현이 우리나라의 교과서에까지 실리면서 중세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현대에 이루어진 ‘중세의 재발견’

흥미롭게도 중세 사상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긍정적 평가는 중세를 강하게 비판했던 근대 사상의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시작되었다. 데카르트부터 강조되기 시작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헤겔의 철학에서 그 절정에 도달했지만, 이런 경향은 보편적 이성 이외의 감정, 육체, 개체들의 소중함을 무시함으로써 많은 문제점을 야기했다. 더욱이 20세기 들어 1, 2차 대전이라는 참상과 환경오염 및 점증하는 자연 재해 같은 새로운 위협 속에 모든 것이 덧없으며 찰나적이라는 허무주의가 널리 퍼져 나갔다. 오늘날 여러 학자들은 근대 사상이 야기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 고대 철학과 중세 철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더욱이 코로나19와 엄청난 환경 재앙을 겪으며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과연 인류는 새롭게 펼쳐진 기술 문명의 놀라운 가능성 앞에서 위험 요소를 어떻게 극복하고 진정한 발전으로 나아갈 것인가? 

수많은 낯선 문화와 충돌하면서도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면서 발전해 갔던 중세는 이 질문에 대해 매우 많은 성찰의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중세인들은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에서 얻게 된 통일과 질서에 대한 열망 안에서 고대 그리스의 소수 엘리트들이 논했던 다양한 주제들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중세인들은 모두 통일과 질서에 대해 추구하면서도, 저마다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상을 전개했다. 이렇게 중세는 결코 획일화된 무채색의 세계가 아니라 각각의 다양한 생각이 열띤 토론과 논쟁을 통해 뚜렷하게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다채로운 세계였다. 


그리스-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처음부터 그리스-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고등 문화의 만남이 그렇듯, 두 문화의 만남은 다양한 갈등을 겪었다.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탄생한 그리스도교는 이성 중심의 고대철학을 이어받은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인생관, 자연관에서 종교관까지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로마제국과 유대교로부터 동시에 박해받던 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이 동등한 신의 자녀’라는 숭고한 인류애를 바탕으로 로마제국 전역에 불길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철저하게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두었던 그리스철학은 절대적 유일신을 인정하는 그리스도교를 만남으로써 양립할 수 없는 많은 부분을 설명해야 했다. 두 문화는 모두 “진리 추구와 인간성 함양이라는 목표”를 공유했지만, 수단과 방법의 차이는 많은 갈등을 낳았다. 그러나 오랜 긴장 관계에 놓였던 철학과 종교는 점차 다양한 단계를 거쳐 융합되었다. 신앙의 토대 위에 철학적 방법론을 결합하려는 지성의 실험이 이루어졌고, 초월적 절대자 아래 세상의 모든 진리를 얻고자 하는 야심이 지성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었다. 중세를 거치며 그리스-로마문화와 그리스도교는 서양 문화를 지탱하는 거대한 두 기둥이 되었다.

 

       Philosophy Presenting The Seven Liberal Arts to Boethius - Coëtivy Master, The J. Paul Getty Museum

〈신 앞에 선 인간〉에 담긴 위대한 사상가들

〈신 앞에 선 인간〉이라는 이 책에서는 그러한 변화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위대한 사상가 5명을 선택해서 주요한 가르침을 개괄하고 있다. 그 첫 단계로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로마 문화를 통합하려 시도했던 사도 바울로(Paulus)의 사상을 살펴본 후, 그리스도교의 등장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고대 그리스철학의 전통에 머물고자 했던 플로티누스(Plotinus)가 발전시킨 신플라톤주의를 고찰했다. 이어서 플라톤주의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명하고 새로운 신학체계로 완성시킨 오리게네스(Origenes)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서양 문화의 중요한 유산을 만들어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사상을 검토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정치에 적용하려 노력했지만 모함을 받아 비운의 운명을 맞았던 보에티우스(Boethius)가 우리에게 어떠한 충고를 남겼는지도 살펴보았다. 

이 책은 두 문화의 결합으로 혼란했던 고대 말기부터 중세 초기 400년가량의 사상적 흐름을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그 안에서 다루어진 서적들, 즉 『성경』, 『엔네아데스』,  『원리론』, 『고백록』과 『신국론』, 『철학의 위안』 등은 인류 지성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한 고전들이다. 필자는 중세 지성사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고전의 문장들을 엄선해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보았다. 짧은 단락이라 하더라도 직접 고전의 일부분을 읽고 이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그 안에 담긴 보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실 중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1~13세기에 그 절정에 달한 스콜라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를 대표하는 5명의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역사의 시그니처 4권에서 다룰 예정이다.
  

중세에서 찾아보는 소중한 가치들

‘중세는 암흑기’라는 판단이 근대 이후 학자들의 오해로부터 유래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는 500년 이상 지난 중세 사상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과연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물어볼 수 있다. 다양한 중세 철학은 이성적인 탐구의 측면에서도 다른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중세의 사상가들은 현대 사회에도 적용할 만한 값진 원리와 원칙들을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혼란했던 격변기에 자기 소명을 다하고자 노력한 지성인이었고, 여러 고난에도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삶의 행복을 찾아 나갔던 삶의 교본이었다. 시대가 변해도 지혜를 향한 인간의 의지와 사랑은 결코 변할 수 없다.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가치를 찾기 위해 경건하게 노력했던 중세 철학자들의 노력과 성과들이 가치의 상실로 방황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도 소중한 사유의 단서를 줄 것을 기대한다. 


박승찬 가톨릭대·철학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중세철학 전공)를 받았다. 한국중세철학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장,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방송 출연, 신문 연재, 다양한 강연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중세에 대해 갖는 편견을 깨고 중세철학이 지닌 매력과 그 깊이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철학의 멘토, 멘토의 철학』,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중세의 재발견』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라틴어 원문에서 번역한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캔터베리의 안셀무스), 『신학요강』, 『대이교도대전 II』, 『존재자와 본질』, 『신앙 1 & 2』(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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