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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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괴담
  •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23.08.0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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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담배 피우면 폐암 걸린다’라는 주장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도 많고 흡연 경험이 없는데도 폐암이 발병한 사람도 적지 않음에도, ‘과학적 진실’로 인정받는다. ‘경험적 사실’과 상치함에도 이 주장을 진실로 인정하는 까닭은 그 ‘상치함’이 왜 발생하는가를 해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담배 연기가 포함하고 있는 수많은 화학 물질들이 폐 조직에 침착하여 세포의 손상이나 돌연변이를 유발함으로써 암세포의 형성과 비정상적인 증식을 촉진한다고 추정하고 그 과정의 일부는 입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진행을 제압할 만큼 면역력이 강하거나 그 과정의 진행을 방해하는 물질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더라도 폐암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해한다.

과학에서 어떤 주장의 ‘진실성’을 판단할 때,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는가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은 기준이다. 더 중요한 기준은 문제의 주장이 경험적 사실의 발생을 어떻게 ‘인과적으로 설명’하는가이다. 과학에서 어떤 주장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발생하는 (또는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인과 과정’에 있다. 즉 과학은 경험적 사실에 대해 이러저러한 실체들이 이러저러하게 (함께) 작동한 결과로 발생한다고 설명함으로써 믿을 수 있는 지식이 된다. 그래서 과학을 ‘왜?’라는 질문에 ‘무엇이, 어떻게’라는 답을 제시하는 작업으로 특징짓기도 한다. 세계의 수많은 사실들을 발생하는 수많은 ‘인과 과정들’ 가운데에는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오로지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아마도 더) 많기 때문에 과학의 연구는 멈추지 않고 전진해 왔고, 그 과정에서 이전까지 ‘진실’로 인정했던 것이 ‘거짓’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과학’을 앞세워 일본의 핵물질 오염수 해양 투기를 정당화하고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옹호하면서, 비판 의견들을 괴담과 가짜뉴스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과학이 무엇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과학이라면 먼저 그것의 진실성이나 타당성을 확인해볼 주장을 내놓아야 한다. 핵물질 오염수 투기가 ‘왜’ 안전하냐고 물으면 하다못해 무한한 양의 바닷물로 오염수를 희석하는 것이므로 안전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 그 주장의 진실성이나 타당성을 검사해볼 수 있다(진실성을 경험으로 검사할 수 없는 주장은 ‘가짜 과학’이라고 지목한 철학자도 있었다). 국제원자력기구가 안전하다고 보고했으므로 ‘과학’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과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고속도로 본사업 타당성 조사 시작 2개월 만에 노선을 누가 왜 어떻게 변경했느냐는 질문에, ‘조사 용역업체의 제안’에 따른 것이라는 답변은 논점을 회피하는 것일 뿐 과학과는 무관하다 (‘갑’인 정부가 발주한 원안에 대해 ‘을’인 용역업체가 용역 시작 1~2개월 만에 비과학적이라며 대안을 내놓는 상황을 내 사회과학적 상상력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이러저러한 주체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러저러한 절차를 통해 변경했다고 답해야 한다. 그래서 그 답변이 합리적이고 타당한지 그리고 나타난 ‘경험적 사실’을 해명할 수 있는지를 검사할 수 있다. 형식적·절차적 합리성을 가장 중시하는 정부관료기구가 (이현령, 비현령이라는 조롱까지 있는) 비용-편익 분석 자료조차 내놓지 못하는 ‘사회과학’은 없다.

그리고 과학은 경쟁 주장이나 비판을 논박함으로써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논박하지 못하면 그것의 진실성과 타당성을 인정한다. 투기한 핵물질이 바다 생태계를 교란할 뿐 아니라 먹이사슬을 통해 축적된 방사성 물질이 인간에게 직접 피해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경쟁 주장이 있으면, 과학은 이러저런 이유로 바다생태계 교란은 일어나지 않는다든지, 방사성 물질은 축적되지 않는다든지, 인간에게 무해하다든지 등등으로 논박해야 한다. “현명한 국민은 괴담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과학과 무관하다. 15년 전 ‘광우병 논란’에도 광우병 발생이 없었으므로 핵 오염수 피해 주장도 마찬가지의 괴담이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담배 피우면 폐암 걸린다는 말은 경험적 사실과 상치하므로 괴담이라고 하는 논리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속도로 노선 변경이 대통령 부인 일가의 개발이익을 위한 것 아니냐는 경쟁 주장에, ‘무엇이 어떻게’를 해명하여 오류로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날파리 선동’, ‘정치적 오물’ 등의 투박한 낙인을 동원하여 혐오와 대결을 유도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앞세운 무지하고 무치한 괴담일 뿐이다. 정책 결정 비판을 ‘과학’ 괴담으로 타격하는 몰과학, 몰이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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