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역사 문해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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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역사 문해력’인가
  • 최호근 고려대·사학
  • 승인 2023.07.3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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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역사 문해력 수업: 누구나 역사를 말하는 시대에 과거와 마주하는 법』 (최호근 지음, 푸른역사, 372쪽, 2023.06)

 

1984년 봄 대학교에 입학할 때, 선배들이 건네준 필독서 목록에 세 권의 역사책이 들어있었다. 영국의 역사가 카(Edward Halle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국내 중진 역사 전공자들이 함께 쓴 《사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강만길 교수의 에세이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었다. 이 세 권에서 시작하여 이제까지 역사 이론과 방법, 그리고 역사서술의 역사를 공부해왔다. 《역사 문해력 수업》은 배우는 즐거움과 능력 부족에 대한 탄식이 빈번하게 교차해온 긴 여정의 산물이다. 책을 마무리 짓기까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앞선 논의들을 제대로 소화했는지, 진부하거나 공허한 이야기를 덧없이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예상 독자의 필요를 제대로 반영하기는 했는지. 수많은 염려가 집필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래서 단일 주제를 다루는 다른 책을 쓸 때보다 멈칫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을 한없이 끈다고 해서 숙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에, 지금 할 수 있는 선에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이 영역에서 내가 다룰 수 있는 주제를 꼽아보니 80개쯤 되었다. 남은 것은 앞으로 다뤄야 할 숙제라 생각하고, 이 책에서는 29개의 주제를 정리했다.

문해력(literacy)은 18세기 유럽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전 18세기는 몰락해가는 귀족과 상승하는 시민계급이 치열하게 경합하던 시대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허리에 칼 차고 대식과 두주불사를 자랑하던 귀족계급의 질서는 시민계급의 거센 도전 속에서 약화되어갔다. 시민계급의 힘은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읽고, 쓰고,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의 증대는 시류의 변화를 한걸음 앞서 파악하고, 귀족계급보다 사람들과 더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8세기와 19세기 서구 사회의 시민들은 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바라보고 자기 뜻대로 바꾸고자 했다. 책은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망원경이자 현미경이었다. 이들은 능동적인 독자였다. 이들은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중요한 부분은 돌아가며 낭독했다. 어떤 때는 유명 책의 저자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열독률도 요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계몽사회는 ‘책 권하는 사회’였다. 시민들은 어느 누가 해석한 내용을 받아 적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눈으로 읽은 책을 자기 방식으로 전유하기 위해 힘썼다. 더 나아가 조금씩 무르익어가는 자기 생각을 글로 적었다. 이처럼 계몽의 시대는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중시한 세계였다. 이 문해력이 사람의 겉과 속을 바꾸고 마침내 세상을 바꿨다. 

세상은 여전히 바뀌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변화는 더 빨라지고, 패턴은 더 복잡해질 것이다. 이 탁류성 급류 속에서 변화해온 세상을 읽고 변화해가는 현재를 파악하며 더욱 더 변화해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일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실용만능의 시대에도 역사를 찾는다. 그렇기에 문해력 결핍이 우리 시대의 큰 화두가 되고 있다.

역사 문해력에는 왕도가 없다. 게다가 미디어 환경도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우리 시대의 역사 텍스트에서 문자의 비중은 나날이 감소하고 있다. 공간과 건축, 이미지와 영상, 소리와 색채 등 다양한 텍스트의 특성과 문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역사 문해력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역사 문해력 수업》은 역사를 읽고 쓰는 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즐겁고 건실하게 역사 공부하는 길을 안내하고자 한다.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처음 소개된 후 벌써 두 세대가 지나갔다. 그 책에 의존해서 역사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지적 환경도 크게 바뀌었다. 무엇보다 우리 독자들의 눈높이와 기대수준도 달라졌다. 역사에 관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 권의 책, 하지만 너무 어렵지는 않은 책이 필요했다. 이것이 《역사 문해력 수업》을 출판한 이유다.

전체 8개의 큰 주제 가운데 내가 가장 공들인 부분은 셋이다. 첫 번째가 제1부 <실용 만능의 시대에도 역사를 찾는 이유>다. 동서양의 구별 없이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데 있었다. 이 기대감은 역사서술이 시작되던 고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국민국가의 등장과 더불어 집단 정체성 수립과 방향성 정립에 대한 봉사가 추가되었다. 프랑스의 역사가 라브루스(Ernest Labrousse)가 정리한 것처럼, 역사가들은 국민의 교사이기를 자처했다. 이때가 역사가들의 황금기였다. 부르주아지의 ‘아름다운 시절’에 역사가들의 가치는 정점을 찍었다. 수상과 국왕이 혜안이나 통찰을 얻기 위해 저명한 역사가들을 집무실로 초대했고, 날로 커져가는 미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업가들이 역사가들의 자문을 받았다. 

일차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 수상 베트만-홀벡(Theobald von Bethmann Hollweg)에게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도 역사가들이었고, 이 작전의 무모함을 경고한 것도 역사가들이었다. 대중의 시대가 시작되자 밑으로부터 변혁을 시도한 사람들이 현실 법정의 피고석에 서서 ‘역사의 법정’에 관해 말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것이 전부일까? 역사를 찾는 이유는 이 네 가지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 연구의 시작에, 그리고 역사 공부의 끝에는 언제나 호기심이 있다. 낯선 세계를 다루는 역사 분야야말로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과 아직 호기심을 잃지 않은 어른들의 놀이터가 되기에 충분하다. 역사 드라마와 영화, 웹툰과 게임이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내가 특히 신경을 쓴 것은 제2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지난 한 세대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이 역사 연구와 서술에 남긴 긍정과 부정의 효과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일본군 ‘위안부’와 마산 여양리 골짜기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골에서 도전을 받은 터에 진실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극한에 이를 때 소수자와 약자에게 무엇이 남게 되는지 따져보았다. 이를 통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그루터기 사실’의 무게를 우리 시대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둘째, 춘천전투의 영웅으로 불리는 심일의 이야기를 통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전쟁사와 엉성한 사후 작성 문서에 기초하여 공인된 기록의 무게를 강변하는 국방부의 거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했다. 국방부는 최종 보고서를 통해 고 심일 소령의 공적이 확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이 보고서의 과정과 결론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춘천전투에 참여했던 장병들의 상이한 기억과 증언, 상훈기록을 포함한 사후 문서들의 부실함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해 군사작전을 하듯 서둘러 마침표를 찍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애정을 갖는 부분은 제4부 <시간감각과 역사의식>이다. 역사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과잉 수준인 우리 사회에서 한때 역사의식은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여부를 가름해주는 기준이었다. 특히 민주화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역사의식이 없다’는 말은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치욕에 가까운 비난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의 물결이 지나간 지금 ‘역사의식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찬찬히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식’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내용과 맥락적 함의에 관해서는 의외로 충분한 숙고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산발적인 용례들을 검토하면서 역사적 시간과 변화, 시간감각과 역사서술, 역사적 사고와 역사의식 사이의 관계를 정리해보았다. 특히 제14장이 국내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논의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역사 공부의 목적이 변화에 대한 감각을 키워가는 데 있다면, 시간에 대한 예민한 의식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시간 개념은 세상의 변화를 가늠하는 측정계였다. 인간은 자기 시대의 시간 개념 위에서 변화의 패턴을 포착하고, 그 변화가 자기 삶에 미칠 파장을 세심하게 따져본다. 이것이 곧 역사적 사고의 시작이다. 역사적 사고는 역사의식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한국인이 그토록 강조하는 역사의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역사 문해력 수업》은 이제껏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이 질문의 연쇄사슬을 더듬어가는 독자들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역사 문해력 수업》에는 과거라는 낯선 세계를 향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필수 어휘들이 담겨있다. 직업적 역사가들이 활용하는 관용어구들과 세상이 변화해온 패턴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문법들도 들어있다. 죽어있는 과거를 현재의 필요에 따라 되살리는 재현의 규칙도 포함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역사를 읽고 쓸 줄 아는 방법의 한 자락을 익힐 수 있기를 바란다.


최호근 고려대·사학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일 근현대사와 역사이론을 전공했고, 독일 빌레펠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외의 역사적 장소들을 탐사하면서 기억문화와 기념문화에 관한 비교 연구를 폭넓게 진행했다. 현재는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의 문화적 영향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초국가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한국 민족주의의 문화적 형성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막스 베버와 역사주의》(독문),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독일의 역사교육》, 《기념의 미래》 외 다수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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