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주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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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주체, 변화
  • 이근세 국민대·철학
  • 승인 2023.07.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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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_ 『고요한 변화』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그린비, 192쪽, 2023.06)

 

20년 전의 사진 속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도저히 ‘나’일 수 없는 얼굴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다. 이목구비를 애써 조합해보면서 비로소 나는 조금씩 나를 알아본다. 언제, 어떻게 나는 지금처럼 되었는가? 

“우리는 우리가 늙는 것을 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늙고 있고 이 늙음은 도드라져 드러나기에는 너무 조금씩 꾸준히 진행 중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안의 모든 것이 늙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늙는다. 흰머리가 생길 뿐 아니라 눈 밑이 처지고, 눈 밑 주름은 패이며, 윤곽은 뭉툭해지고, 몸매는 둔중해지며, 얼굴은 ‘회반죽’처럼 된다.”(프랑수아 줄리앙, 『고요한 변화』, 8쪽)

‘나’의 늙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태이지만 늙는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비가시성은 내면이나 심리에 속하는 비가시성도 아니고 감각과 분리된 이데아의 비가시성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상 특유의 비가시성이다. 이 명백한 사태는 고요하게 이루어진 변화의 산물이다. 서양철학은 ‘고요한 변화’를 사유하지 못했다.

『고요한 변화』는 동서문화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 1951~)이 2009년 출간한 저작 Les transformations silencieuses의 번역이다. 『고요한 변화』는 11권째 국역이다. 역자에게는 그의 세 저작 『전략: 고대그리스에서 현대중국까지』(2015),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2020), 『탈합치』(2021)에 이어 4번째 국역이다. ‘고요한 변화’라는 제목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거유(巨儒) 왕부지(王夫之)의 문장인 “은밀한 이동과 고요한 변화”(潜移默化)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책에서 줄리앙은 동서양의 사유를 능란하게 오가며 늙음, 사랑, 역사, 시간, 정치, 전략, 미디어, 철학의 위상 등의 다양한 주제를 변화에 대한 통찰을 통해 논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상은 주제의 다양성과 관점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의 일관성을 내포한다. 최근 정신분석가들과 행한 대담에서 그는 자기 작업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나는 내가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려 시도한다. 이것이 어느 정도 내 사유의 전말이다.” 그의 사유는 간극(écart)의 사유이다. 간극은 프랑스어 동사 écarter에서 온 낱말로서 “사이를 벌리다”라는 뜻이다. 간극은 ‘사이’를 내포하므로 복수성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타문화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정신과 간극을 벌리고 자신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낯섦을 창출하는 작업이 간극의 사유이다. 그러나 간극은 차이가 아니다. 차이는 비교를 통해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줄리앙이 거부하는 ‘비교’는 유럽 사유와 중국 사유의 정체성을 각각 규정하여 두 정체성의 차이를 드러내거나, 또는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서 두 사유를 융합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간극은 정체를 규정하지 않고 탐험의 시각을 활성화한다. 탐험은 유럽 사유와 중국 사유를 맞대면시킬 때 벌어진 ‘사이’에서 긴장과 낯섦을 체험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일이다.    

동서양 사유의 간극이 벌어지는 과정을 『고요한 변화』에서 분석된 『장자(莊子)』 〈지락(至樂)〉 편의 유명한 구절을 사례로 살펴보자. 장자는 부인이 죽은 후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고,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기는커녕 노래하는 그를 나무라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헤아릴 수 없음에 뒤섞인 가운데 변하면 기가 있고 기가 변하면 현실화하며 현실화함이 변하면 삶이 있다.”(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이 구문의 프랑스어 번역은 서양 번역가를 인도유럽어의 관용어법에 묶어두는 속박을 내포한다. 프랑스에서 정본으로 활용되는 번역은 다음과 같다. “달아나가고 포착 불가능한 어떤 것(quelque chose)이 기로 변하고, 기는 형체로, 형체는 삶으로 변한다.” 이 번역은 어떻게 보면 왜곡된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오역이라고 할 수 없는 정갈한 문장이다. 그러나 이 번역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의 첨가이다. 『장자』 원문에는 주어가 없다. “어떤 것”으로 번역되고 영어의 something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의 quelque chose는 가장 규정성이 약한 명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아나가고 포착 불가능한’(fuyant et insaisissable)이라는 술어가 지시하는 주어로 등장한다. 이 ‘어떤 것’은 변화의 주체가 되어 기가 되고 형체가 되고 삶이 된다. 이 구문의 모든 술어가 귀속되는 실체이자 주체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번역은 중국어 문장이 내포할 여지가 없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 어떤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주체와 존재, 그리고 그 기원의 규정에 대한 서양철학 전통의 익숙한 질문이 부과되는 것이다. 

“이 어떤 것의 출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단절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무엇의 단절이고 무엇에 의한 단절인가? 또는 이 출현은 아무것도 없다가ex nihilo 생겨난 것인가? 이어서 이런 창조를 정당화하려면 신을 상정해야 하는가? 이런 여러 질문들이 부과되는 것이다. 언어의 간극으로부터 삶을 생각할 수 있고 삶의 운명을 조직하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 나온다. 철학의 질문이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모든 철학은 관용어법에 묶인 채 나중에서야 나타난다. 철학은 관용어법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요한 변화』, 54~55쪽)

줄리앙이 유럽 사유의 편견을 드러내기 위한 ‘바깥’으로 중국을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어와 관련된다. 중국어는 서양철학을 구성하는 인도유럽어의 바깥, 즉 ‘다른 곳’이다. 위 문구를 프랑스 번역처럼 옮기는 것은 주어/주체와 술어 기능을 중국어에 부과함으로써, 유럽 언어와 동족성(同族性)이 없는 바깥의 언어에 자기의 시각을 당연한 듯 투영하는 일종의 자기민족중심주의이다. 이는 자기 사유의 틀을 자기도 모르게 고수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나 한 언어와 다른 언어의 편차 자체만으로도 철학을 재가동할 수 있다. 편하게 기대어온 굄목을 치워볼 필요가 있다. 실체화된 주어, 주체가 없다면 서양의 사유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유럽 사유가 생생한 변화 또는 이행과정(transition)을 파악하지 못하고 변화 아래에 놓인 주체 또는 기체(基體)를 전제하는 것은 유럽 언어의 탓이다. ‘주체’ 또는 주어로 번역되는 subject는 ‘아래’(sub)와 ‘던지다’ 또는 ‘놓다’(jacere)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스 사유는 세 가지 차원에서 언어의 족쇄에 묶여 있다. 세 가지는 규정, 명사화(실체화), 술어 기능이다. 첫째는 규정이다. 로고스(logos)의 기능은 사유에서 비-규정성을 제거함으로써 사유를 가장 ‘명확하게’ 하는 것인데, 이는 이미 유럽 언어의 형태론과 통사론을 따르는 것이다. 둘째는 명사화 또는 실체화이다. 명사는 동사에서 분리되어야 하며, ‘아래에 고정되어 있고’, 동시에 실체(sub-stance)로서 명사는 절(節)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고유의 존재를 가리켜야 한다. 끝으로, 절의 기능은 절의 기반을 이루는 주어에 다소 우연한 방식으로 속성을 정하는 것, 달리 말하면 술어를 부여하는 것이며, 이는 주어에 속성을 귀속시킴으로써 주체의 특질들을 여러 가능한 상태로서 배열하는 것이다. 그리스어는 격변화, 빈위(賓位) 규정, 성(性), 수(數)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술어들은 항상 존재에 기대어 있다.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 1951~)

서양어와 중국어의 맞대면은 즉각 낯섦을 일으킨다. 이 맞대면은 편안하게 기대어온 굄목을 치우면서 서양의 언어 및 사유의 습벽(習癖)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고 삶과 세계를 사유하게 한다. 보편성을 자부해온 서양철학이 특수한 문화의 산물로 나타난다. 단 하나의 언어만 존재한다면 언어는 성찰을 멈출 것이고 철학은 죽을 것이다.

언어의 문제 외에도 중국은 역사의 차원에서 유럽과 아무 영향관계에 있지 않다. 중국 역사는 유럽 역사의 바깥이다. 16세기 후반부터 동서교섭을 통해 교류는 본격화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중국 사유는 체계가 확립된 상태였다. 따라서 수많은 개념의 어원을 추적하며 철학사를 구성해온 서양철학은 중국 사유를 마주칠 때 더 이상 자신의 역사에 기댈 수 없다. 서양의 역사에서 빠져나옴으로써 철학사와 단절한다면, 서양의 정신이 의거해온, 심지어 비판해온 개념과 학설의 계보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다면, 사유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위에서 분석한 술어 기능, 즉 술어들을 받쳐주는 주어, 속성들이 귀속되는 주체/실체의 구조는 단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철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현대까지 이어지는 서양철학사를 이룬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철학을 실체와 속성 개념 없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 각자 실체와 속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고 나아가 대립하기까지 하지만, 항상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그들 사유의 핵심 구조를 이룬다. 라이프니츠가 모나드(monade)라 일컫는 실체 역시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포괄하며, 모나드 자체는 단순하지만 속성들의 다수성은 모나드에 귀속된다. 어떤 행위에는 반드시 이 행위에 전제된 주체가 있다. 칸트에서도 감성을 통해 수용되는 대상을 지성(오성)의 범주에 따라 구성하는 조건으로서 자아의 선험성 또는 초월성이 전제된다. 이 모든 사상들은 주체/주어-속성/술어의 구조를 이룬다. 현대철학자인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에서도 주체의 ‘구성’을 위해서는 대상으로서 주어진 것 이외에, 상황 자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보충’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즉, ‘주체’가 구성되려면, ‘무엇인가 있음’이라는 평범한 상황을 넘어선 어떤 일이 ‘사건’으로서 일어나야만 한다. 이 역시 주체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유럽 전통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존재, 신, 이상, 정신, 물질, 자유, 목적, 주체, 객체, 본질, 현존 등의 철학소(哲學素)를 무심코 비껴가는 중국 사유와 같은 체계를 만날 때 사유에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렇다고 서양철학을 구성하는 이런 개념들의 부재가 중국 사유의 미성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시금 서양을 모든 사유의 기준으로 삼고 나머지 사유를 서양의 하위 부류나 변주로 간주하는 패권주의, 문화보편주의 또는 자기민족중심주의에 불과하다. 중국 사유는 고도의 상징체계에 기초한 텍스트를 통해 고대부터 다양한 학파들이 견고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온 온전한 사유이다. 중국은 이해 체계의 다른 원천을 개척했고 서양의 ‘다른 곳’일 뿐이다.

『고요한 변화』는 유럽 사유와 중국 사유를 맞대면시키는 수십 권의 저작 중 하나이다. 이 저작에서 줄리앙은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둔 서양철학이 인도유럽어에 종속된 채, 중국 사유와 달리 ‘변화’ 또는 ‘이행과정’을 제대로 사유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석한다. 서양철학은 변화 아래에 존재, 주체 등 항존하는 본질 또는 고정된 정체성을 전제함으로써 세계, 삶, 역사, 정치 등 모든 분야를 존재와 생성, 이상과 현실, 실체와 속성, 필연과 우연 등의 이원성, 주체의 결단, 단절, 사건을 통해 바라보거나, 유동성을 별도로 사유하기 위해 추상화된 ‘시간’ 개념을 발명해내는 반면, 중국 사유는 천지만물을 변화 자체로 보기 때문에 서양철학이 세계와 삶의 연속성을 사유하기 위해 겪는 장애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일례로 서양철학은 늙음을 사유하지 못한다. 서양철학은 로고스와 존재론에 의거해 ‘사물’들(흰머리, 주름, 얼굴색, 목소리 등)을 세밀히 규정하여 구분하겠지만 늙음은 특정 부분이 아닌 전체가 늙는 현상이다. 주체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겨지는 심리도 고요한 변화를 따른다. 어느새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연인의 상황을 생각해보라. 단절은 연인 중 한 명이 어느 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상대방이 마음 아파하는 사건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새로운 만남 자체도 결과일 뿐이다. 

“살짝 간 금이 고요하게 틈새, 갈라짐, 큰 균열, 도랑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미미한 것이 무한한 것이 되어, 그들 사이의 ‘모든 것’이 전염된 채 나타났다. 흔히 말하듯이 간극은 벌어졌다. 즉, 갑자기 놀라움을 자아내고 분리를 이루는 무관심의 구덩이에 이를 때까지 간극은 그 자체로 펼쳐져 버렸다. 어떤 점에서 이런 것이 아직도 주체들의 사안이겠는가?”(『고요한 변화』, 24쪽) 

모두가 잘 알다시피, 헤어진 연인들이 애정의 상실에 대해 서로를 비난하는 것만큼 헛된 일도 없다. 그들이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상황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단절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을 중심으로 정치·사회 현상을 바라볼 경우 우리는 주체들이나 다른 사건 등 이 현상의 규정된 원인들을 지목하지만, 이 원인들은 ‘사건’의 심층에서 고요하게 작동한 무한정한 동력을 포괄하지 못한다. 거대 사건이었던 9.11 사태조차도 냉전 체제와 소련이 해체되면서 세계화가 고요하게 진행되고 부정성의 힘이 갈 곳을 모른 채 긴 시간 축적되어 테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세계화는 세상 전반에 걸친, 눈에 잘 띄지 않는 변화이다. 경제와 관련한 이해관계가 시장 법칙에 의해 동일한 세계에 너무도 긴밀하게 얽혀 있는바, 믿음이나 가치 같은 것이 다른 차원으로 밀려난 것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앙 같은 완강한 이데올로기가 독자성을 가진 온전한 권리로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는 국제 협력과 같은 뻔뻔한 위선과 함께 만장일치로 내세워진 선한 대의에 대항하는 폭력으로 폭발했다. 9.11 사태가 힘의 관계와 정치 행위의 난폭한 변천을 내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사태가 부정성이 고요하게 숙성된 결과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고요한 변화를 도외시한 채 몇몇 테러분자를 원인으로 보는 것은 단견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의 거대한 역사, 우리 사회의 큰 ‘사건’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오늘날 미디어는 삶의 대부분 영역을 사건 위주로 재단하며, 마치 하루하루, 나아가 하루 자체도 여러 부분으로 조각나고 단절된 것처럼 다양한 사건의 연쇄로 세상을 채운다. 많은 정치·경제 세력 역시 그들이 지향해왔던 모습과 반대의 모습이 된 자신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대중도 그들 스스로도 이해 못하는 이중성을 보이곤 한다. 얼마나 많은 이념가들이 어느새 기득권이 되어 있고, 얼마나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어느새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과정을 못 보고 결과를 확인할 뿐이다. 늙는 과정을 못 보지만 어느새 늙어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빙하가 녹는 과정을 보지 못하지만 어느새 황량해진 땅을 목도하듯이, 사회 현상 역시 고요한 변화를 따르고 있다. 고요한 변화 과정을 추적하며 우리의 세계, 사회, 삶을 성찰할 때, 서양철학의 습벽을 이루는 ‘존재’, ‘주체’, ‘사건’의 관성에 종속된 섣부른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근세 국민대·철학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대학교 철학고등연구소(ISP)에서 스피노자 철학과 모리스 블롱델의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서양근대철학, 프랑스철학, 동서문화철학이다. 국내에 출간된 프랑수아 줄리앙의 저서 10권 중 3권인 『전략: 고대그리스에서 현대중국까지』, 『문화적 정체성은 없다』, 『탈합치』를 번역했다. 프랑수아 줄리앙 사상을 토대로 창립된 프랑스 학술단체 〈탈합치 연합〉의 학술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탈합치 사유를 활성화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효율성, 문명의 편견』, 『철학의 물음들』, 『스피노자, 욕망의 기하학』 등과 다수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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