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을 넣은 홍차 한 잔에 숨겨진 노예무역과 식민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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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을 넣은 홍차 한 잔에 숨겨진 노예무역과 식민지의 역사
  • 김정희 경기대·일어일문학
  • 승인 2023.07.2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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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_ 『설탕으로 보는 세계사』 (가와키타 미노루 지음, 김정희 옮김,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28쪽, 2023.06)

 

이 책은 일본의 역사학자 가와키타 미노루(川北稔)의 저서로, 그는 두 가지 관점에서 근대의 세계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근대 이후의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 시스템’이라는 관점과 인간의 생활 실태를 물건이나 관습을 통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역사 인류학’이라는 관점이다. 이들을 바탕으로 이 책은 설탕이라는 ‘세계 상품’을 통해서 16~19세기에 걸친 세계사를 바라보고 있다. 

‘세계 상품’이란 설탕, 면직물과 같이 특정 나라에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소비하는 상품을 의미한다. 설탕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저자는 인간의 생활상, 특히 상류계층만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생활을 살펴보고 있다. 또한 ‘세계 상품’인 설탕은 말 그대로 세계에서 통용된 상품이므로, 근대의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노예무역, 식민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먼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설탕의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드러나는 노예무역과 식민지의 역사에 대해서 소개하겠다. 

이 책은 설탕이 유럽으로 들어오게 된 경위부터 설명하고 있다. 유럽인 중 설탕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기원전 4세기에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 알렉산더 대왕의 병사들이었다. 이후 8세기에 지중해를 석권한 이슬람교도들이 설탕을 유럽과 그 외의 지역으로 널리 전파하면서 사탕수수 재배와 제당 기술이 전해지게 되었다.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설탕의 생산이 급속하게 증가한 것은 16세기 초부터이다. 15세기부터 아프리카 서해안과 아시아로 진출하게 된 포르투갈인들은 16세기가 되자 대서양의 섬들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을 이용하여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고급 식품인 설탕을 플랜테이션(plantation)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고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탕수수 재배지를 찾기 위해 중남미로 진출하게 된다. 플랜테이션이란 설탕 등 이른바 세계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주로 유럽인들이 식민지나 제3국에 선주민 또는 강제적으로 동원된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작물을 경작하는 시스템을 뜻한다.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안티과(Antigua) 십경』(1823) 중 「카리브해의 사탕수수 재배」> 
                          사진=https://www.bl.uk/collection-items/cutting-the-sugar-cane-antigua

16세기 설탕 생산의 중심지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이었다. 그러나 17세기가 되자 세계를 누비며 활약하기 시작한 네덜란드인들의 중개로 영국령과 프랑스령의 카리브해 섬들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한다. 카리브해의 섬에서는 오로지 사탕수수만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이 발달하여 현지의 식량을 북아메리카에서 수입할 정도였다. 플랜테이션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의 선주민인 카리베족은 거의 소멸되었고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부유해진 유럽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플랜터planter라고 한다)은 부를 축적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고 소수의 백인 감독관과 다수의 흑인들만이 이 지역에서 살게 된다. 

유럽은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설탕과 이것을 생산하기 위한 노동력인 노예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실현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리버풀(Liverpool)에서 출발한 노예무역선은 노예와 교환하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 왕국이 원하는 철포와 면직물 등을 가지고 가서 이것을 흑인 노예들과 교환했다. 그 후 이들을 남북 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섬들에 팔아버리고는 설탕과 면화를 얻어 리버풀로 돌아왔다. 이처럼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의 세 대륙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통해 유럽인들은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유럽 중북부에 위치한 슐레지엔(Schlesien)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시작된 7년 전쟁(1756~1763년)은 남북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로까지 확산되었다. 전쟁의 당사자국 중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유럽 내에서만 아니라 해외 식민지를 쟁취하기 위한 쟁탈전을 다른 지역에서 벌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식민지 쟁탈전은 설탕, 면직물 등 ‘세계 상품’의 생산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노예무역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영국은 남북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어 바야흐로 세계무역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19세기 초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완성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영국의 식량정책은 대전환기를 맞이한다. 이 무렵 설탕을 넣은 홍차는 노동자들의 아침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고가의 물품이었다. 설탕이 비쌀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플랜터들이 ‘서인도제도파’라는 압력 단체를 만들어 의회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영국령 식민지 이외의 설탕을 수입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즉 영국령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설탕은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장경영자들에게는 노동자들의 아침식사가 저렴하게 공급되는 것이 그들의 임금을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서인도제도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노예무역과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이라는 방식을 취했고, 의원 중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07년에는 노예무역이 폐지되었고, 1833년에는 영국령 식민지에서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또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가지고 있던 차에 대한 독점 무역권도 폐지되었다. 따라서 영국령 카리브해 식민지의 설탕 생산은 여전히 노예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던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영국령 이외의 식민지에서도 노예무역과 노예제도가 점차 폐지되었고, 노동력은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에서 온 계약노동자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던 노예무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렇다면 설탕은 유럽 사람들의 생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설탕은 달콤한 맛과 새하얀 색깔 때문에 일찍부터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매우 적은 양만이 유통되어 17세기 초까지도 고급 조미료나 약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설탕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상류계층들로, 그들 사이에서 설탕은 스테이터스 심볼(status symbol)로 작용했다. 이러한 설탕의 사용량이 늘어나게 된 것은 설탕과 홍차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영국 런던의 동인도 회사> (East India House, London) 
                             사진=https://www.britannica.com/topic/East-India-Company

1600년에 영국에서 설립된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 무역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손에 넣고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까지 차 역시 설탕과 마찬가지로 귀한 약품으로 사용되어 스테이터스 심볼로 인식되었다. 이후 상류계층에서는 이 두 개의 스테이터스 심볼을 동시에 섭취하는 방식, 즉 홍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드러냈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상류계급을 흉내 내려고 했고, 17세기 후반이 되자 때마침 홍차의 생산량이 증가하여 가격이 하락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카리브해 섬들에서도 설탕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설탕 가격도 하락하게 된다. 이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설탕을 넣은 홍차를 마시게 되는데 특히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커피 하우스였다. 

커피 하우스란 영국의 도시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00여 년 동안 유행했던 곳으로, 귀족과 젠틀맨들의 사교를 위한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홍차와 커피, 초콜릿(당시에는 고형이 아닌 액체로 된 형태였음)에 설탕을 넣어서 판매했는데 이 음료를 마시며 사람들은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을 벌였다. 이것은 청교도 혁명(1640~1660년)으로 인해 사람들이 신분과 계층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게 된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 하우스는 영국의 근대 문화를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잡지와 신문은 이곳에서 다루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탄생했고, 문학 등 문화에 관한 다양한 토론도 이루어졌다. 심지어 정당과 유사한 모임도 이곳에서 탄생했으며, 주식의 가격에 관한 정보교환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청교도 혁명 시기를 지나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같은 계급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커피 하우스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커피 하우스에서 마시던 홍차는 가정에서 즐기는 음료로 변신하게 된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도시에 거주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숫자가 농민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도시 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은 매우 열악해서 수도 등의 시설은 물론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부엌조차 없었다. 따라서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아침식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가게에서 산 빵과 설탕을 넣은 홍차 등을 곁들여 먹는 영국식 아침식사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English Breakfast)가 그것이다. 설탕을 넣은 홍차는 카페인이 포함된, 즉시 효과가 나는 칼로리 공급원으로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적합한 식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변화 때문에 19세기에는 설탕을 넣은 홍차가 젠틀맨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한편, 공장노동자로 대표되는 민중 생활을 상징하는 식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는 상류사회에서 탄생한 것으로, 좋은 홍차와 찻잔을 사용하는 고급문화를 상징한다. 반면,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며 노동을 위한 에너지를 섭취하기 위해서 설탕을 넣은 홍차를 마시는 습관인 티 브레이크(Tea Break, 중간 휴식)도 탄생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시작된 영국식 아침식사는 농촌으로 퍼져나갔다. 이미 영국인들은 세계무역 없이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근대 세계 시스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16세기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나라들이 손에 넣고자 애썼던 설탕은 현대에는 건강과 미용의 적으로 인식되어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서 만든 ‘근대 세계 시스템’은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 많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인 청년들을 노예로 빼앗긴 아프리카는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잃어버렸고,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섬들은 오로지 사탕수수만을 생산하는 체제 때문에 다른 산업이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상실했다. 이곳에서 창출된 부는 전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것이 커피 하우스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현재 우리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사회구조를 창출했다. 현재의 우리의 삶은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성립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정희 경기대·일어일문학

경기대학교 인문대학 일어일문전공 교수이다. 일본 도쿄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일본문화의 연속성과 변화』(보고사, 2018), 공저로는 『처음 읽는 겐지 이야기』(가초샤, 2020) 등이 있다. 역서로 『메이지 유신』(2020),  『동시대 일본 소설을 만나러 가다』(2021)등이 있으며 최근 논문으로는 「1960년대 사드 재판과 신좌익(New Reft)」(2022)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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