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과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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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07.1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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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형 칼럼]

지난 6월 22일부터 25일까지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제31차 유럽한국학회 학술대회가 열렸다. 유럽 각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학자들이 참석한 꽤 큰 학술 행사였다. 필자도 이번 대회에서 논문 두 편을 발표할 기회가 생겨 다녀왔다.

그런데 학술대회장에 도착해 보니 행사 기간 내내 한국학 학술대회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영어가 많이 들렸다. 개회식과 폐회식에서도 영어만 쓰였고, 160편에 이르는 발표 논문들 역시 한국어 논문보다 영어 논문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이 행사는 한국학 분야의 학술대회인 만큼 한국어 발표를 기본으로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영어 등 다른 언어를 허용하는 것이 옳지 않았겠는가 싶다. 사실 필자 역시 논문 두 편 중 하나는 영어로 발표하고 나머지 하나만 한국어로 발표했다. 처음에는 두 편 모두 한국어로 발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영어를 쓰기로 한 세션에서는 이른바 ‘대세’를 따라 필자 역시 영어 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 세션 발표 때는 한국어를 쓰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번 학술대회 참가자들 중에는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청중들도 많으니 영어를 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 또한 현실이 그렇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원론적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국학을 공부하면서 학술대회까지 참가하겠다는 사람이라면 우선 한국어부터 적어도 자기 전공 분야의 학술 활동이 가능한 수준으로 배우고 와야 할 것이다. 한국학 분야의 논저들 가운데 한국어로 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어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들을 시시각각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과 한국어로 소통할 수 없다면 어찌 한국학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독일어를 모르면서 독일 역사나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프랑스어를 모르면서 프랑스 사회와 정치 등을 학문적으로 논한다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듯이 한국학 전공자라면 먼저 한국어부터 배우고 나서 다른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상식이다. 

한국학에 이제 막 입문한 대학 저학년생들이나 초보자들은 학술대회장에서 듣는 한국어가 낯설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학술대회는 기본적으로 전문가를 위한 자리지 초보자를 위한 자리가 아니다. 설령 초보자가 학술대회에 참가했다 해도 한국어로 수준 높은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테니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외국에 한국어학을 전공할 수 있는 곳이 아직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 또한 문제다. 세계 각국에 한국어 교원들이 파견되어 있지만 한국어학 전공자, 즉 한국어를 전공하는 언어학자를 외국 현지에서 양성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른 곳은 아직 기대만큼 많지 않은 실정이다. 한국 대학의 영어영문학과, 독어독문학과에서 영어학자, 독일어학자를 양성하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 심지어 자기 대학의 한국어 수업은 한국어 자체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 역사나 정치 등을 공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한국학과 교수들조차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학과’라는 간판을 내걸기 위해서는 역사도 좋고 정치도 좋지만 무엇보다 먼저 한국어학 전공자부터 양성하는 것이 합당하다. 한국어학을 전공하고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우선 늘어나야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학을 배우는 사람도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학은 앞으로 계속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한국어학 전공자 없이 역사학자, 정치학자 등으로만 전임 교수진을 구성하는 한국학과는 장차 한계에 봉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한계를 넘지 못하는 한국학과들은 곧 한국학 전체의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은 사실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세계 각국의 한국학과에서 먼저 한국어학 전공자부터 길러 내서 그 전공자들이 자기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 역사나 정치 등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을 더 많이, 그리고 체계적으로 길러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학 관련 국제 학술대회에서는 참가자의 모어와 국적에 관계없이 논문 발표와 토론을 한국어로 하도록 적극 권장해야 한다. 이러한 곳에서는 개회식이나 폐회식 같은 행사들도 한국어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어가 사실상 학문 세계의 공용어처럼 되어 버린 것이 현실이고 영어로 된 논문을 발표하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일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한국어를 학술 언어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일을 세계 각국의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학술대회이다. 한국학 학술대회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로 생각을 나누고 교류를 한다면 한국어가 학술 언어로서 더욱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고, 한국학은 물론 한국학의 연구 대상인 한국을 위해서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차기 유럽한국학회 학술대회는 2025년에 영국 에든버러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한국학과 관련된 크고 작은 학술대회가 해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릴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곳에서, 더 다양한 곳에서 깊이 있는 학술 토론과 대화가 한국어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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