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체험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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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체험된 사실이다
  • 손지민 단국대학교·철학
  • 승인 2023.07.1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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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_ 『미학에 고하는 작별』 (장-마리 셰퍼 지음, 손지민 옮김, 세창출판사, 160쪽, 2023.05)

 

아름다움은 삶 속에서 그것에 대한 기억과 생각보다 항상 먼저, 그리고 더욱 깊숙한 내면에서부터 발생한다.

내가 느낀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과 생각은 아름다움이라는 본래의 사태에 관한 것이라는 위 명제는 매우 자연스럽고 자명한 듯 보여 별다른 중요성을 띠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얼핏 보면 가볍게 듣고 넘길 수 있는 이 명제는 생각보다 서구 미학의 역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본래 ‘미학’이라는 명칭이 ‘미에 관한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여기서 ‘미’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과 생각이기 전에 아름다움이라는 사태일 것이고, 그렇다면 미학이 이 사태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임 역시 자명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동시에 미학은 ‘학’, 즉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학문이어야 하며, 그 때문에 철학과 논리학 내부의 분과 학문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음도 상기되어야 한다. 서구 근대 미학은 그 시발점부터 아름다움이라는 사태와 그것에 대한 기억과 생각 간의 긴장관계를 수용하고 해명해야 하는 학문으로서 구체화되었다. 

이 긴장관계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매일 일어난다. 더 정확하게 그것은 가장 주관적인 차원에서부터 우리의 삶을 구성해나간다. 우선 우리의 삶 속에서 아름다움이라는 사태가 발생할 때,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아름답게 경험할 때 그 사태는 어느 누구의 사태도 아닌 나 자신이 체험한 사태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아름다움이란 모두 삶 속에서 체험되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것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 항상 선행한다. 즉, 특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관념이 한 개인의 아름다움이라는 사태를 규정할 수는 없다. 

 

내가 길거리 화단의 작은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때, 버스에 올라타서 무선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에 심취할 때, 단편소설을 읽으며 나에게 와 닿은 한 구절을 되뇔 때, 가족과 오붓한 주말 오후를 보내며 행복감을 느낄 때, 운동을 하며 온몸으로 상쾌함을 느낄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미적 체험이 ‘왜’ 또는 어떤 연유로 아름다웠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체험된 아름다움의 가치를 온전히 대변해줄 수는 없다. 친구와 방금 본 영화를 아름답게 체험한 내가 왜, 어떻게 그 영화를 아름답게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그 체험된 사태에 부여하는 중요성이 저해될 수는 없다. 오로지 그 체험이 발생하는 ‘지금 여기’는 체험된 아름다움이라는 사태이며, 짧게는 하루, 길게는 평생 기억에 남게 된다.

셰퍼의 저서 『미학에 고하는 작별』은 미학이 이 사태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저자의 역설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사태를 촉발시킬 수 있는 대상은 돌 한 개, 구름 한 점부터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현실 속의 모든 사물들이다. 셰퍼가 보기에 서구 현대 미학은 18세기 근대 유럽 철학에서 시작된 이래로 위 [선(先)사태-후(後)고찰] 명제를 다시 상기해야 하며,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이 회귀의 과정은 간단히 말해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과 생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사태를 규정, 판단, 이론화하려 했던 철학적 미학의 자연화 과정이었다. 이 회귀를 바라는 사람들은 미학은 아름다움에 대한 체계적, 논리적 고찰이기 전에 아름다움 그 자체, 즉 삶 속에서의 비범한 체험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태도를 필히 견지한다. 

이들 중 한 사람인 셰퍼가 보기에 미학은 철학 영역 속에서 지적으로 과잉됨으로써 점점 체험된 삶과 멀어지게 되었고, 기존 미학이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도모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가 기존 미학에 작별을 고하면서 추구하는 미학은 경험 영역 내의 사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 분석하는 기술적記述的 미학이다. 이러한 미학이 가능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론이 아닌 아름다움이라는 사태에 대한 면밀한 과학적(인지심리학적, 신경과학적, 인류학적, 사회과학적) 분석이다. 이에 그는 자연히 아름다움이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심신 전체에서 나타나는 영향을 분석해야만 한다는 필요성, 그리고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삶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을 우선적으로 도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자각한 것이다.

이러한 셰퍼의 새로운 사태지향적 접근방식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매우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제시된 영화의 예시를 다시금 불러들이자면, 내가 영화를 보며 체험한 아름다움이 예상치 못한 우발적 사건이었다 하더라도 그 체험의 총체는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사태가 아니다. 분명 그러한 체험을 한 데에는 당사자만이 가진, 그러한 체험을 가능케 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는 당사자가 거쳐 온 역사와 그 사람이 몸담고 있는 사회적 환경과 문화, 성향뿐만 아니라 그의 신경생물학적 조건들에 대한 분석까지 모두 포함한다. 동시에, 그 사태가 발생한 이유는 오로지 나만이 갖고 있지만 그 이유를 모두 그 근원부터 이해하고 알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 몸 안의, 내 상상계 안의, 내 이성 안의 미시적 논리들이 만들어 내는 역학이 그러한 사태를 자각하고 그것에서 의미를 도출해 내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만약 내가 느낀 이 아름다움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나에게 어떤 가치를 안겨주고, 어떻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까를 고찰한다면 그러한 고찰은 필히 나 자신에 대한 매우 철저한 성찰을 요구할 것이다. 셰퍼는 『미학에 고하는 작별』을 비롯한 다른 여러 저작에서 독자들에게 그러한 성찰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내가 느낀 아름다움의 출처와 방향성에 대한 고찰은 나의 성향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경험을 할 것인지, 어떤 진로를 겨냥할 것인지, 나아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반을 제공한다. 게다가 셰퍼가 말하듯 내가 느낀 아름다움은 실제로 나 자신의 미세한 감정들과 관계하는 향유적 체험이므로 나 자신에게 가치 있고 고귀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도 까다롭다. 만약 주체로서의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다면 나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향에 민감해지고 그것에 대한 솔직한 자기평가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만약 위 내용이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근대 이후 철학은 물론 인류학, 사회학, 문화학도 사태지향적 미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미적 관계의 주관적 성격이 인류의 미적 행동들의 개진, 다양화, 그리고 항구적 풍부화의 원인으로 생각될 수 있는 여지는 다분하다. 진상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렇게 의심해 볼 수 있다.”


손지민 단국대학교·철학

단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영국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대학 팡테옹-소르본(Paris-I Pantheon-Sorbonne)에서 서양현대미술사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4년에서 2015년까지 뉴욕 콜롬비아대학교에서 visiting scholar로 박사 연구를 진행한 바 있고,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저, 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예술에서의 반복과 그에 대한 착각』(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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