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문학교육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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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문학교육의 쓸모
  • 최현희 한국외대·국문학
  • 승인 2023.07.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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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그 능력을 직접적으로 써먹는 직업이란 대학의 문학 전공 교수밖에 없으니 쓸모가 없다. 그 능력이 간접적으로 활용되는 직업이라 해도 출판사의 문학 관련 편집자, 언론사의 문학 담당 기자 외에는 딱히 없다. 사실 문학 전공 교수마저도 작품 독해력보다는 다른 능력이 더 요구되는 게 요즘이다. 글쓰기 능력보다는 코딩 능력이, 고급 독해력보다는 디지털인문학적 데이터 처리 기술이 더 각광받는다. 

대학의 학제 개편이 논의되는 회의 자리에 가면 인공지능, 코딩, 4차산업혁명, 빅데이터 등의 개념이 난무한다. 평생을 문학작품 읽기에 매진해온 학자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수강생들과 10편 내외의 작품을 읽으며 한 학기를 보내는 내 강의법이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닌가, 글 한 줄의 의미와 맥락을 밝히기 위해 수십 페이지의 논문을 쓰는 내 연구법은 무용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평생을 유교경전과 한문 지식만 수련해온 전근대의 식자층이 서구화와 근대화의 물결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느꼈을 당혹감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러나 실제로 강단에 서면 이 당혹감은 사라지고 보람과 확신을 느끼게 된다. 작품의 행간을 채우고 있는 의미의 층들을 한 꺼풀씩 벗겨나가는 과정은 교수자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각성의 기쁨을 준다. 타인의 글의 개성을 수사학적 개념으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그 의도를 전기적, 역사적 자료를 통해 재구성해가면서, 작가의 사상이 다각적으로 검토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사상의 성립 조건을 반성해보게 된다. 

문학작품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 길을 잃고 헤매며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한 사람이 가장 확신에 차서 자기의 주장을 명료한 언어로 선언하는 순간에조차, 그 확신이 현재 우리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요소들의 개입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닌지, 그 언어의 명료성마저도 사실은 애매함의 아이러니한 드러남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것이다.

문학작품을 읽어가며 얻는 각성이란, 따라서 작품의 궁극적 의미나 그 저자의 사상의 의의에 관한 게 아니다. 한 인간의 사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게 형성되는지, 그 사상을 표현하는 데는 얼마나 불확실한 요소들이 작용하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우리가 얻는 각성이란, 우리가 얼마나 모든 것을 아는 체하면서 살고 있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심오하게 무지한가 하는 깨달음이다.

그러니 결국 문학작품 읽기 능력이란 쓸모가 없어 보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사상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길이란 애초에 없을뿐더러 끝없이 헤매기만 하는 나를 발견할 뿐이니 말이다. 염상섭의 1922년 중편소설 「만세전」은 3.1운동 직전의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다. 대학생 이인화의 눈을 통해 바라본 1918년 조선의 현실은 참혹하다. 식민화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한국인들은 물샐 틈 없는 차별과 억압의 시스템에 완전히 포박되어 있다. 

더 끔찍한 것은 한국인들 스스로 그 체제를 문제의식도 없이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그런 식의 무기력을 세상의 이치를 자연스럽게 체화하고자 하는 주체성의 발현으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식민지인은 일본인에게 차별과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그 상황을 대면하여 타개하려 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냥 즐기고 말지 뭐, 하는 식의 정신승리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주인공 이인화는 식민지 한국인의 이런 식의 자기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그에 대해 아낌없는 비판을 퍼붓는다. 그래서 그는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한국을 등지고 식민본국의 수도 도쿄로 남은 공부를 하러 돌아갈 뿐이다. 염상섭은 왜 이런 식으로 소설의 결말을 맺었을까? 뼛속까지 식민화된 한국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이인화처럼 비판의식만 예리한 설익은 지식인은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 체제와 그 내부인들의 내적 모순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으로는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방법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막다른 상황을 철저하게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 식민지 한국인의 내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통해 3.1운동의 궁극적 실패 원인을 진단하기 위해서?

염상섭의 의도는 이 중 하나였을 수도 있고 여럿이었을 수도 있고 이 중에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선택지 중 하나를, 여럿을, 전부를 어떤 맥락에서 택할 수도 있고 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은 내가 사는 현재의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바꿔나가고 싶은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그러니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현재의 나를 이해하고 내가 속해 있는 이 현실 속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문제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이런 과정을 문학작품을 읽는, 정확하게 독창적으로 읽는 수업 시간이 아니고 어디서 거칠 수 있을까? 이 과정이 어떤 정량적 데이터 처리기술이나 그런 처리 과정에 대한 관리감독 행위로 대체될 수 있을까?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주체성 있는 인간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텐데 우리는 기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기계가 되기를 원한다 해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러니 문학작품을 정확하게 독창적으로 읽는 능력은 쓸모가 있다. 내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나’, 즉 주체성 있는 인간이기를 멈추고 싶은지, 그렇게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지를 문학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의 사고를 통해 프로세스해볼 수 있다. 나의 실존 자체에 대한 질문을 나의 사고로 하는 것보다 나에게 더 쓸모 있는 과정이 있을까? 

그런 과정 없이 기술의 발전이 이끄는 대로 가다보면 나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행복의 세계에 들어서 있는 나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자꾸 ‘나’와 나의 불완전한 ‘사고’를 개입시켜 그 행복에의 길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 ‘나’에게 무슨 쓸모가 있는지 상관없이 그저 일단 나아가 보자는 말이다. 문학작품 읽기의 쓸모없음을 주장하는 논리야말로, 이런 점에서 보면 쓸모가 없다.

그러니 문학작품을 읽는 능력은 적어도 ‘나’에게는 정말로 결정적인 쓸모가 있다. 우리는 이런 차원까지 생각하고 문학연구와 교육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열어주는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있는데 언제까지 시어(詩語) 하나, 소설의 인물 한 명을 붙잡고 있을 셈인가 하고 면박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면박을 주는 자의 실존 자체가 경각에 달려 있음을 각성시키는 최량의 방법 중 하나가 문학작품 정확하게 읽기이다. 


최현희 한국외대·국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전공으로 석사를,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학 동아시아어문학과에서 일제 말기 한국 모더니즘 문학과 전체주의 문화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도둑맞은 이름들: 한국 근대문학과 식민지 모더니즘』, 『동아시아 예술담론의 계보』(공저), 『미래가 사라져갈 때』(공역), 『다문화주의 시대의 비교문학』(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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