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過猶不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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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 정진배 연세대·중문학
  • 승인 2023.07.1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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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만큼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심한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교육이란 굳이 비유하자면, 머리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몸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 음식물 섭취가 필요하듯, 머리에도 적절한 지식을 공급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계속 먹기만 하고 그것을 배설하지 못하면 인간은 살 수 없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대부분의 질병은 영양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양 과잉으로 인해 초래되는 것이다. 몸이 그러할진대,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흥이 나면 저절로 음악에 맞춰 율동한다. 이를 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좀 더 체계적으로 춤을 가르치려는 마음에서, 아이들을 전문 학원으로 보낸다. 그런데 강습에 돌입하는 순간, 원래의 자연스러웠던 아이들의 몸과 몸짓은 그 즉시 경직돼 버린다. 그러고는 부단한 노력을 거쳐, 그 아이는 원래의 자연스러웠던 몸의 율동을 회복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동작을 좀 더 자연스럽게! 동작을 자연스럽게!”를 외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의식하면 할수록 행동이 점점 더 어색해 진다. 실로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장자』 「추수편」에는 ‘한단학보’(邯鄲學步)라는 고사가 등장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의 한단 사람들은 걷는 모습이 특별히 멋있다고 알려져, 이웃나라 청년이 한단 사람들의 걷는 모습을 배우기 위해 그곳을 찾아갔다. 그는 매일 한단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관찰하며, 몇 달 동안을 따라 하였지만, 끝내 배울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설상가상으로 그는 자신의 원래 걷는 법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 젊은이는 네 발로 기어서 자기가 살던 거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과장이 다소 섞여있기는 하지만, 맹목적인 배움의 병폐를 암시하는 우화이다. 선불교의 목적은 깨닫고자 하는 수행자에게, ‘아무 것도 깨달을 것이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깨치기 위해 수행자는 죽도록 수행에 정진한다. 생각하면, 우스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북아시아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금강경』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즉비’(卽非) 법문이 등장한다. 단편적 사례를 한 구절 경전에서 인용해 보자, “부처님이 설법하신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여기서 ‘반야바라밀’이라 함은 사물을 통찰하는 깊은 지혜를 암시하며, 인용한 문장은 우리가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의 의미에 집착하지 않을 때, 비로소 반야지혜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참으로 오묘한 설법이 아닐 수 없다.

『금강경』의 이같은 설명이 다소 난해하다면,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려 보자. 조각가는 바위를 다듬어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조각가의 작업은 원래의 바위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으로 떠올린 개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궁극에는 애당초 조각가가 심안으로 관(觀)했던 바위속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두 발로 걸어가는 것은 몸에 특별한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면 별다른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두 발로 걸을 수 있는지를 말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두 개의 상이한 세계에 살고 있다. 하나는 말과 이름으로 구축된 관념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실재의 세계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통해 실재의 세계를 재해석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도된 양태를 바로잡을 뾰족한 방도가 없다. 말과 이름은 인간에게 부여된 일종의 숙명적인 ‘카르마’(名言習氣)가 아니겠는가. 

현대 사회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성공을 담보하는 천하의 명약인양 꾸역꾸역 머리에 집어넣기만 하고 이를 적절히 비워낼 줄 모르면, 그것의 병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로 인해, 양생의 도리를 논하는 장에서 장자는 ‘유한한 생명으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참으로 위태롭다’고 경고하였다. 우리 모두 한 번쯤 새겨들어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다. 


정진배 연세대·중문학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UCLA 동아시아학과에서 중국 현대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주립대학(스토니브룩) 비교문학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불교 인식론, 주역적 사유논리, 동서양 비교사상 및 문화 연구 등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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