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학술생태계 속 ‘한국에서 연구하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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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학술생태계 속 ‘한국에서 연구하기’란?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3.07.15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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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유연대 심포지움]
- ‘대량’ ‘부실’ 학술지 운영 실태 분석 및 인문사회 학술생태계 살리기 위한 대안 모색

 

대학과 인문사회과학 학술장 전반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한국의 학술생태계에서 “연구”하는 행위가 직면하는 문제는 무엇이며, 건강한 학술문화와 학술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꿔야 하나?

한국에서 ‘영어 논문 쓰기,’ ‘부실 학술지에 투고하기’ 등 ‘한국에서 연구하기’를 솔직하게 진단하고 앞으로의 방향과 대안을 함께 모색하는 심포지움이 열렸다. 

지식공유연대(새로운 학문 생산 체제와 ‘지식 공유’를 위한 학술단체와 연구자 연대)는 지난 14일(금) 서울 마포에 있는 ‘연구자의 집 R커먼즈 합정’에서 〈‘한국에서 연구’하기〉를 주제로 2023 연례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번 심포지움은 척박한 연구자 문화와 학술 생산·유통 구조 속에서 한국 대학과 학술장의 병폐, 특히 대량·부실 학술지 운영 ‘실상’을 분석하고 학술생태계를 살리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됐다.

한국 학술문화의 개혁과 OA운동에 앞장서 온 지식공유연대가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 민교협2.0(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 교수연구자협의회)과 공동 주최했다.

천정환 교수(성균관대, 지식공유연대 공동대표)의 사회로 1부에서는 <한국에서의 ‘약탈적(predatory)’이고 ‘부실한’ 연구>를 주제로 하여 발표는 △김병준(KCI 부실 의심 학술지의 정량적인 특징: A학술지의 사례), △김완종(오픈액세스의 명과 암)이 맡았다. 

<한국에서 연구자로 계속 살아가기 위하여>를 주제로 진행된 2부는 △이송희ㆍ유현미("한국에서 박사하기" 이후의 새판 짜기: 학계 거버넌스 구조 재편과 연구자 연대), △고찬미(한국에서 영어 논문 쓰기), △박서현(한국 인문사회분야 학술커먼즈의 과제)이 발표를 맡았다.

발표에 이어 박배균 교수(서울대, 지식공유연대 공동대표)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진행됐으며, 이후 지식공유연대 2023 연례 총회가 열렸다.

 

7월 14일(금) 서울 마포에 있는 ‘연구자의 집 R커먼즈 합정’에서 〈‘한국에서 연구’하기〉를 주제로 개최된 지식공유연대 2023 연례 심포지엄

【주요 발표 내용】


■ 제1부 한국에서의 ‘약탈적(predatory)’이고 ‘부실한’ 연구

▶ 김병준(KAIST) … 〈KCI 부실 의심 학술지의 정량적인 특징: A학술지의 사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센터의 김병준 박사는 작년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실태점검 결과 등재 취소가 결정된 A학술지의 논문게재 양상을 정량 분석했다. 

 

그 결과 이 학술지는 2022년 무려 1,500편이 넘는 논문을 출판하면서 KCI 인문사회 분야 논문 게재량 1위를 기록했다. (인문사회 학술지는 연평균 30건 이하 논문을 출판한다. 2022년 기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첫째, A학술지 편집진은 10매 이상의 분량에 추가 게재료를 부과하여 투고자들에게 사실상 10매 이하 짧은 분량을 요구했다. 그 결과 게재 학술지는 평균 13.7매를 기록했는데, 이는 인문사회과학 논문 중에서는 상당히 짧은 편이다. 이 학술지의 논문들은 분량을 줄이기 위해 참고문헌 수도 적게 제시했다. ‘논문 공장화’의 한 양상이라 볼 수 있다. 

둘째, A학술지는 (학회의 관례를 어기고) 편집위원을 포함한 투고자자들에게 동일 호 복수 게재, 연달아 세 번 이상 게재를 허락하는 등 반복 논문 투고를 유도했다. 엄격한 기준을 가진 학술지들은 편집위원의 투고와 동일 연구자의 논문 연속·반복 게재를 제한한다.

또한 김병준 박사는 일부 연구자들과 ‘부실’ ‘대량 출판’ 학술지가 공생관계를 이루어왔다는 점도 지적했다. A학술지와 또 다른 대량 출판 학술지의 논문 저자들은 서로 인용해주면서 그들끼리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특히 A학술지의 논문이 많이 인용된 대량 출판 학술지 4종은 최근 1~2년 사이에 결국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등재 탈락’ 판정을 받았다. ‘닫힌 인용 네트워크’에 대한 규제가 가해진 셈이다.  

이런 양상은 물론 대학들이 서열 경쟁을 하면서 연구자들에게 양적 논문 게재 실적을 맹목적으로 강요한 결과다.
 
ㅇ 전망: 제도적인 결함과 한국 학계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A학술지뿐만 아니라 또 다른 대량 출판 학술지가 존재하며, 앞으로도 생겨날 여지가 있다. 한 해에 수천 편의 논문을 출판하는 학술지의 존재는 현재 진행형의 문제다. 

ㅇ 대안: 연구자들 중 이런 ‘부실’ ‘대량 출판’ 학술지에 별 생각 없이 투고했다가 피해를 당한 경우들도 있다. 연구재단 등재지라 안심하지 말고 뚜렷한 전문분야 없이 투고를 장려·독려하는 학술지면 의심해야 한다. 

 

▶ 김완종(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KISTI) … 〈오픈액세스의 명과 암〉

김완종 박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오픈액세스센터 센터장)는 오픈액세스 운동이 야기한 효과를 분석하고, 특히 외국의 ‘부실 의심 학술지’의 사례를 중심으로 연구자들이 취해야 할 자세와 제도적 대안을 강조했다. 투명한 동료심사를 위한 Open Peer Review와 학술활동에 대한 질적 평가로의 전환이 적극적·소극적 연구 부정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제2부 한국에서 연구자로 계속 살아가기 위하여

▶ 고찬미(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에서 영어 논문 쓰기〉

고찬미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전문위원·영문학술지 편집인)는 국내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어떤 이유로 영어논문을 쓰는지, 그리고 그 학문적 효과가 무엇인지 분석했다.

대학 소속 연구자들은 SCI급 논문을 게재하면 대학에 따라 300만원 내지 1,000만원의 장려금을 받고 인사고과에서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학들의 서열 경쟁과 ‘국제화’ 지표를 올리기 위한 정책 때문이다.  

ㅇ 문제점: 이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국내 학자들에 의해 영어논문은 대량 생산되고 있으며 ‘학문의 식민화’에 대한 우려가 높다. 그러나 정작 그런 영어논문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거의 읽히지 않고 인용되지도 않는다. SCI급 논문이지만 해당 분야 국내 학술지 인용 순위가 대부분 하위 10%에 머물거나 그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제적 소통과 학술교류를 위해서 영어논문 작성도 분명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를 위한 실제적 준비나 표준적인 학술용어 표기법조차 국내 학계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ㅇ 대안·전망: ‘영어로 논문 쓰기’와 ‘한국어로 학문하기’에 대한 정확한 의식뿐 아니라, 국내 영어논문이 영어 이용자에게 닿을 수 있는 오픈플랫폼 등의 적극적인 제도적인 보완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 이송희(울산대)·유현미(창원대) … 〈"한국에서 박사하기" 이후의 새판 짜기: 학계 거버넌스 구조 재편과 연구자 연대〉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공동 저자였던 이송희(울산대)·유현미(창원대) 박사는, 『한국에서 박사하기』가 야기한 논쟁을 정리하고, 학계 거버넌스 구조 재편과 연구자 연대를 위한 진단과 대안을 세세하게 제기했다. 그간의 학술사회 위한 노력에 대해 평가하고 연구자 주체성의 결여의 이유를 진단한 것은 진일보한 성과이다. 

두 저자는 대학(원)-학계-국가-사회의 다양한 의사소통 경로를 구성하고, 학술 정책과 제도에 적응하고 저항하기를 넘어 그것의 형성과정 자체에 참여하여 변화시키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주요 내용》

∎ 가속화된 학계와 평가시스템

• 단위 논문 중심의 성과 지표(번역, 단행본, 평론, 아카이빙, 대중 활동, 현장 연구 활동 반영 어떻게?)
• 젠더, 계급, 나이, 지역, 출신 대학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보편적인” 평가 지표.
• 커리어 모델의 다양성 부재와 사회적 인정 부족

∎ 국내외 학계의 위계적 이중구조 

• 박사의 위계화 : 미국 박사 – 국내 “명문대” 박사 – 국내 박사
• “석사대학원”에 그치는 한국의 박사과정과 박사 교육제도 및 교육과정의 부재

∎ 대학원 거버넌스의 필요성

• 한정된 자원과 자원 배분(지역, 학벌, 젠더) 불균형
• 학내 위계 구조 및 의사결정 구조 개선

ㅇ 『한국에서 박사하기』에서의 제안 재강조

• 횡적 네트워크 결성 지원: 횡적 네트워크 결성 시 만성 인력난, 심한 노동 강도, 쉽지 않은 세대교체의 문제. 민주적 운영 방식의 상시적 점검과 노동에 상응하는 대가/인정 제공. 지역간, 대학간, 연구자간, 학계-사회 간 네트워크-플랫폼.
• 학계의 대변인 육성: 사회와 국가 기구와 소통하고 연구자 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공공지식인, 학술정책 전문가(집단) 육성. 이를 위해서는 단위 학술지 논문 중심 성과 인정 지표/인사평가 체계 변화도 필요. 
• 연구자 사회에서 스스로에 대한 명예 복권. 국가 책임/지원 주장 넘어 그 지원이 누구를 통해서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구체적 데이터 축적, 방향 논의 필요. 스스로의 존재 조건을 만들고 변화시키기. 

 

▶ 박서현(제주대) … 〈한국 인문사회분야 학술커먼즈의 과제〉
  
박서현 박사는 대학 바깥에서 여기저기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독립적 학술공동체를 ‘학술 커먼즈’로 명명하고, 이들이 일으키는 변화에 주목해야 할 필요를 역설했다. 학술커먼즈의 과제는 연구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학술지식을 생산하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생산의 가능성을 키워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새로운 학술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학술공동체는 보통 같은 전공의 연구자들이 모여 공통의 관심사에 입각한 연구 성과를 교류함으로써 연구를 더 확대·심화하기 위해 설립하는 전통적 학회와는 다르다. 이런 학술공동체들은 각각의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학회와 마찬가지로 연구 교류를 포함한 공통의 활동을 통해 공통의 문제의식을 심화하고 이러한 심화된 문제의식을 경우에 따라 강연·발표·출판 등을 통해 표현하여 확산한다.

이들 학술공동체들은 연구자의 학술적 고민, 관심 이외에도 인문사회분야 학술생태계의 문제에 공감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며 그에 대한 대안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이런 학술공동체들이 연대하여 연구자들의 기댈 언덕이 되고, 또 학술진흥기관과 대학을 자극하고 변화시키는 긍정적인 학술생태계의 구축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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