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시대, 제도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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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시대, 제도를 묻다
  • 이혁우 배재대 행정학과 교수
  • 승인 2023.07.09 10: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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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산업혁명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에서 시작되었다. 전기차는 일론 머스크, 스마트폰은 스티브잡스, 페이스북은 주커버그의 이름이 붙는다. 기술이 시대를 만든다는 건 산업혁명, 정보혁명과 같은 시대를 정하는 이름붙임에서도 확인된다. 생각해보면, 인류는 20년 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기술에 의지해 매일매일을 살고 있다.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연인들의 추억 같은 건 이제 없다. 

모든 것을 기술이 정한다는 기술결정론의 시대다. 그런데 틀렸다. ‘기술개발은 왜 가능했을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놓쳐서이다. 천재가 만드는 게 기술이라는 대답은 너무 단순하다. 어디에나 천재는 있다. 굳이 스마트폰을 스티브잡스가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이다. 

기술시대에 기술을 가능하게 한, 안 보이는 제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임스와트의 증기기관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실험이 가능했던 제도에 있다. 개인의 자유로운 탐구가 보장되었고, 어쩌다 만들어진 발명품에는 특허가 부여되어 이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발명품이 판매되는 시장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에디슨이 끊임없이 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발명품을 사줄 사람들이 시장에 있었고 시장거래에 제약이 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기술의 역사라기보다는 제도의 역사이다. 제도 경쟁에서 승리한 지역과 국가, 공동체는 보다 활발한 기술창출이 가능했고, 그 결과 전례 없는 풍요와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무 진부해져 버린 예이지만, 지난 70여 년의 한국과 북한, 두 국가 운영의 성적표의 차이는 제도 차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같은 지역, 같은 역사, 같은 사람, 같은 성향, 같은 제도를 공유했었던 지역이 남북으로 갈리며, 한반도에선 딱 한 가지 다른 실험을 했다. 다른 제도를 적용해 보는 것. 이런 차이법의 실험이 70년간 이루어진 결과, 인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회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닌 제도라는 것을.

이제 당연히 따라오는 질문은 어떤 제도인가라는 것이다. 제도는 원래 진화적이어서 누구 한 사람의 의도나 지식으로 그 물길을 바꿀 수 없다. 공교롭게도 퇴행적 제도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 퇴행적 제도 위에 올라탄 사람이나 공동체조차, 함께 못사는 길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때가 많다. 아니, 더 나은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다는 미사여구는 퇴행적 제도에 늘 붙는 수식어이다.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좋은 제도도 미리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2009년 7월, 지금은 다 잊혀진 두고두고 사례연구가 될 법한 일이 있었다. 미디어 3법으로 불렸던 신문법, 방송법, IPTV법이 소란스런 국회의사결정을 거쳐 통과되었다. 국회법에 규정된 심사보고, 제안설명, 질의 및 토의 등의 절차가 생략된 상황에서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투표에 붙여졌고 여당인 한나라당은 의결정족수를 충족시키려고 대리투표도 했고, 재석의원수가 의결정족수에 미치지 못하자, 재투표까지 단행한 끝에 이 법은 통과되었다. 이 과정에서 역대급 몸싸움과 멱살잡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종합편성채널, 종편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국회를 극도로 분열시킨 건, 이념가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종편 등장으로 보수언론이 압도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다양성을 먹고 사는 민주주의를 훼손시킬 것이라는 주장과 종편의 등장으로 방송시장에서도 보다 다양한 매체를 열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부딪쳤었다. 양쪽 다 한걸음도 양보할 수 없었으니 파국은 예견된 셈이었고, 힘의 논리가 국회를 압도했던 것이다. 

이때의 영상을 유튜브를 켜고 보면 인간은 미래를 모르고, 늘 불완전한 판단을 한다. 그러고도 놀랍게도 확신에 차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땠을까? 종편시장은 보수일색이 되지 않았다. 아니 이념적으로 보다 다양해졌다. 오히려 공중파보다 양측의 가치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했다. 더구나 다양하고 재미있는 교양프로나 예능프로, 드라마가 만들어진 것은 국회에서 멱살잡이를 한 어느 쪽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다. 뉴스와 보도에 치우친 이들의 판단이, 방송매체가 많아지면, 이들도 결국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는 예상은 놓쳤다. 이념보다 중요한 게 살아남는 일이고, 살아남으려면 소위 보수종편이든 진보종편이든 시청자가 가볍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다. 

또 있다. 대학에 방송, 미디어 관련 학과가 만들어지더니 공연예술, 영상, 보컬, 웹툰에까지 뻗쳐나갔다. 엄마, 아빠 가족회사 수준의 매니저 시스템도 대형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성장했다. 이제 JYP, SM, YG, 빅히트는 웬만하면 아는 익숙한 회사이름이 되었다. 이것이 지난 15년간 진행된 일이라면 미디어 3법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ChatGPT 시대 유럽에서 AI규제를 신속하게 도입했다. 2023년 7월에 벌어진 일이다. 유럽은 기술발전 속도만큼 제도 도입에도 순발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런 시도를 보며, 한편으론 걱정이 앞선다. 2009년 미디어 3법의 데자뷔도 생각난다. 그 시절 이 법을 그토록 반대하던, 의원직 사퇴까지 선언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아직 현역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 이들에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미디어 3법의 미래가 어땠었느냐고. 그렇다면 이제 막 만들어져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ChatGPT 시대가 AI규제로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기술시대에 제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고.

보수나, 진보나 불완전한 지식으로 국가경영을 해 보겠다고 나서는 건 마찬가지이다. 완벽할 수 없으니 겸손하고, 실험해 봐야하고, 타협해야 한다. 나아가 잘 될지 모르는 어떤 시도가 있다면 사전에 못하게 막지 말고, 실험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맞다. 2009년 7월, 미디 3법 장면을 다시 되돌리면, 야당이든 여당이든 몇 개의 종편이라도 시범적으로 해 보자는 결정을 왜 악수하며 통과시키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무리한 절차를 가면서까지 미디어법을 했던 여당이나, 극렬히 반대했던 야당이나 지금 돌이켜 보면 머쓱한 풍경임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기술발전의 시대, 기술이 아닌 제도가 사회를, 발전을, 풍요를, 새로움을, 기회를 결정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도 온 사회가 시끄러울 만큼 부딪치는 사건들도 이런 관점에서 한 번 낯설게 볼 필요도 있다. 지금의 시끄러움이 5년 후엔 과연 어떻게 해석될 건지를.  


이혁우 배재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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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빈 2023-07-12 20:10:58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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