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함께 함’을 구현하는 ‘탈아’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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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함께 함’을 구현하는 ‘탈아’의 예술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3.06.26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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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경 칼럼]

지난 4월 19일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이 초대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와 통일 독일의 첫 번째 총리였던 헬무트 콜(Helmut Kohl)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특별공로대십자훈장’을 받았다. 그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정치인”으로 지칭된 메르켈은 장장 5,860일간 총리직을 수행해 그의 전임이었던 콜 총리의 16년 26일에 단 6일 부족한 16년 20일로 최장수 재임 2위 기록을 세웠다. 

그뿐 아니라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 자리를 4년 연속 지켰고 타임지의 2015년 ‘올해의 인물’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하버드대는 2019년 메르켈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386번째 입학식 축사자라는 영예를 안겼다. 만델라와 솔제니친도 이 특별한 하버드 의례를 거쳐 갔고, 1943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1947년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 그리고 1990년 메르켈 자신의 정치적 멘토이자 전임자였던 헬무트 콜 총리와 같은 정치적 거물들도 이 특별한 자리에 초청된 적이 있었다.

이쯤 되면 그에게는 뭔가 아주 특별한 게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메르켈의 동료와 지인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술된 『메르켈 리더십: 합의에 이르는 힘』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메르켈의 정치리더십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평범 속의 비범’이라는 말이 가장 적확한 표현일 것 같다. 늘 같은 형태의 옷과 머리 모양, 웃음기 없는 표정, 한결같이 차분한 시선과 조용조용한 어조 등은 메르켈의 평범성을 확인시키는 요소다. 역설적이게도 이점이 마가렛 대처나 힐러리 클린턴, 또는 테리사 메이와 같은 유명한 여성 정치인의 화사함이나 도드라짐과는 180도 다른 면모이니 그게 오히려 ‘비범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평범의 요소들이 정치인 메르켈을 비범한 인물로 보이게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표현처럼 ‘道’라는 것은 본시 정해진 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므로 우리가 무엇을 함께 ‘道’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것이 곧 ‘道’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 다시 메르켈의 정치 스타일에 적용해본다면 과학자 출신인 그는 우리가 흔히 과학자에게서 발견하는 형식주의나 엄숙주의에 매몰되기보다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 누구와도 치열한 정책 토론을 벌이고 상호 합의된 결과물을 존중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정치인으로 변신한 과학자 메르켈은 정책 토론장을 마치 상이한 의견들의 타당성을 비교 검증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일종의 담론적 실험실 같은 것으로 취급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절대적 진리 대신 합의된 진리를 신뢰한다.

2019년 9월 하버드대의 입학식에서 연사 소개 순서를 맡은 동창회장 마거릿 왕은 “메르켈 총리는 [동성혼을 포함한] 평등 결혼을 장려했고 독일 최초로 최저임금법을 통과시켰으며 100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에게 국경을 개방했다”(『메르켈 리더십』, 344쪽)라며 그의 대표적 치적을 제시했다. 물론 동성혼과 최저임금법 지지 결정은 독일의 보수당인 기민련(CDU) 소속 총리에게는 거의 정치적 도박이나 다름없는 행보였다. 특히 루터교 목사의 딸이자 기독교도였던 메르켈이 동성 결혼을 인정했다는 것은 결코 적잖은 개인적 희생을 전제한 정치적 결정임이 틀림없다. 

2018년 유럽 정상들 대부분이 정치적 득실을 고려해 자국의 대문을 꽁꽁 닫아걸 때 백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을 전격 수용한 메르켈의 통 큰 결단은 여전히 논쟁적이면서도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는 공적으로 꼽힌다. 이른바 ‘무티’(mutti)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된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촌평과 함께.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극우 지지세가 무섭게 확장하던 당시 독일 내 정치·사회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대규모 난민 수용 결정은 사실상 정치적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르켈과 기민당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고 당내에서도 찬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림으로써 메르켈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뒤 스스로 당대표에서 물러나고 차기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함으로써 갈등 확산을 막는 동시에 비난 여론에 대한 책임을 지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대승적 차원에서 볼 때 메르켈의 정치적 도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의 포용적 난민정책은 국제사회, 특히 유럽연합 내 독일의 경제적 입지에 더해 정치적 리더십이 한층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외적으로 과거 히틀러의 제3제국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 독일이라는 수치스러운 기억을 상당 부분 이완시키는 심리적 효과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사건적 의의를 이제야 인식했다는 듯 지금 독일인들은 당시 메르켈의 정치적 소신과 결단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헬무트 콜의 16년이 동서독 통일과 하나 된 독일의 정치·정제·사회·문화 체제의 안정화에 집중한 시기였다면, 앙겔라 메르켈의 16년은 유럽연합 내 독일의 정치적 역할과 역내 리더십이 공고해지고 나아가 국제사회의 중요한 행위자로 발돋움한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메르켈의 국외 정치적 성공의 결정적 요인으로는 국내 정치의 안정성이라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 존재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메르켈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무한 헌신을 서약한 독일의 정치가답게 선공후사의 원칙에 따라 기민련과 사민당(SPD) 사이의 ‘흑적’ 연합정부를 출범시킴으로써 독일 내부의 사회적 통합을 이뤄낼 수 있었다. 

독일의 현대 정치사에는 총 네 차례의 ‘대연정’ 사례가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 1966년을 제외한 세 번 모두 메르켈이 주도한 경우였다. 2009년을 제외하고는 2005년, 2013년, 2017년 총선 승리 후 정부 구성과정에서 사민당과 전격적으로 ‘흑적’ 연합정부를 꾸리는 초강수 대통합의 정치로 선회한 것이다. 이점에서도 그는 그 어떤 역대 총리와도 ‘비교 불가능한 정치인’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동독에서 35년을 보낸 메르켈은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평등’ 가치 실현 정책의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 훈련받은 덕분에 ‘탈이념적’ 접근법이 비교적 용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대목에서 2013년 ‘대연정’의 탄생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 기민·기사련은 총 311석을 확보하여 정부 출범 요건인 316석 과반에 5석 부족한 성적표를 받았다. 이에 메르켈은 193석을 얻은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꾸리기 위해 부총리를 비롯하여 외교, 법무, 노동사회, 환경, 가족 같은 ‘노른자’ 장관직을 사민당에 내주었고, 최저임금법, 양육수당 인상, 연금 수령 63세 지급, 독일 태생 이민자 자녀 이중국적 허용 등 상당수의 사민당 정책도 추가로 수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비싼 대가를 치른 결과 독일 국민 80%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행정부와 가장 안정된 국가 체제를 출범시킬 수 있었고, 4년 뒤 또 한번의 대연정에 돌입할 수 있었다. 메르켈이 독일의 국제적 위상 제고와 유럽연합 내 정치리더십 확장에 필요한 정치적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대연정 덕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메르켈이 펼친 대승적 국내 정치의 국외적 파급효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전 독일 총리 메르켈의 정치리더십에 관해 잠시 반추해보았다. 오늘 우리 정치인들의 온갖 작태로 인해 정신이 몹시 어지럽고 마음이 하도 허전하여 인지적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필시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근본적 차이는 ‘탈아’(脫我)와 ‘탐아’(貪我)의 구분일 터, 대승적 메르켈과 소승적 한국 정치인들 사이의 차이도 결국은 이 구분으로 환원된다. ‘道’를 ‘道’라 하면 이미 ‘道’가 아니듯, ‘我’를 탐하는 순간 정치는 형해화한다. 모름지기 정치는 ‘함께 함’(togetherness)을 구현하는 ‘脫我’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오매불망 우리 정치가 이러한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의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 패러다임,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2017), 『한국 민주주의의 새 길: 직접민주주의와 숙의의 제도화』(공저, 2022), 『문화의 이동과 이동하는 권리』(공저, 2022), 역서로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 『책임과 판단』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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