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의 금강산 그림에는 정치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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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금강산 그림에는 정치가 들어 있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6.1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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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 정선의 그림 선생 | 이성현 지음 | 들녘 | 392쪽

 

이 책은 겸재가 그려낸 금강산 그림의 배경과 함의를 들추어내는 작업이다. 화제시는 물론이고 그림 속에 심어놓은 힌트들을 세심히 추적하여 기존 미술사가들이 곡해했거나 놓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낸다.

선비들의 그림은 사의성寫意性을 가장 중요시한다. 옛 선비들은 그림 속에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소통)할 수 있는 장치를 따로 마련해두기도 했다. 이런 그림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선비의 고고한 품격’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 얼버무리는 기존 해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선비의 품격이란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행위와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조선 선비들의 그림을 정치적 행위의 일환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동양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 했다. 그 그림 속에 선비의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읽으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비의 그림에 사용된 특유의 조형어법과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던 한시 및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양 고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겸재(1676-1759)의 화명畫名이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신묘년풍악도첩》이 그려지면서부터였다. 그가 서른여섯 되던 해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 삼연 김창흡(1653-1722)의 제5차 금강산 여행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그림첩이다. 삼연 김창흡은 ‘호락논쟁湖洛論爭’의 한복판에서 낙론을 이끌었던 노론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이다. 그이만큼 금강산 여행을 자주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유는 금강산 자체보다는 그곳에 깃들어 있는 사찰(승려)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노론은 불교계의 힘을 통제해야 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즉, 조정에서 밀려난 남인과 소론 인사들이 금강산 불교계를 자극하여 연합 세력을 결성하면 큰 화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겸재를 삼연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하도록 천거해준 사람은 사천 이병연(1671-1751)이었다. 그와 겸재는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바꿔보며 교유함’ 관계로 불린다. 그러나 ‘볼 간看’은 ‘시간을 두고 변화를 살핌’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글자로, ‘시화환상간’은 ‘두 사람이 시와 그림을 교환하며 서로의 작품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봄’이란 뜻에 가깝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의 작품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교유하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될까? 두 사람은 왜 서로의 작품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을까? 두 사람이 하나의 주제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며 한목소리를 내는, 이른바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의 효과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금강산 만이천봉을 모두 부숴버리고 싶다’는 삼연 김창흡의 생각을 사천 이병연은 겸재의 《신묘년풍악도첩》 속 〈단발령망금강산〉을 통해 바꾸게 하였다. 즉, 삼연이 당시 파악하고 있던 금강산 불교계에 대한 정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사천이 비유하였고, 이를 삼연이 받아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쌍방의 정치적 생각과 행위를 겸재의 그림을 통해 주고받았던 셈이다.

사천은 제시題詩 「관정원백무중화비로봉 觀鄭元伯無中畵毗盧峯」이란 시에서, 겸재의 호방한 성격과 천재성을 아끼는 마음을 보이는 한편, 그를 ‘낭중무화필囊中無畵筆’이라 하였다. ‘낭중무화필’이란 ‘주머니 속에 그림 그리는 붓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주머니 속에 그림을 담아낼 화의畵意가 없다’는 뜻이다. 왜 그랬을까? 사천은 금강산이 아무리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절경이라 해도 감흥에 취해 풍경을 옮기는 것은 선비의 그림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겸재가 이를 무시하고 가슴을 뛰게 하는 절경을 옮기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사천은 선비의 그림을 보고자 겸재를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케 했던 것인데, 겸재가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쟁이의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방자하다는 말까지 한다.

사천의 이 제시題詩에서는 겸재가 그린 금강산 그림을 선비의 그림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어떻게 수정하도록 했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주고 있다. 교만하게 누워 움직이려 하지 않는 그림 비로봉의 모습은 허락할 수 없으니, 당당한 비로봉의 위용을 떨어뜨려(낮춰) 다시 그리라고 했다는 부분이다.

미술사가들은 겸재와 사천이 ‘시화환상간’을 하며 서로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는 두 사람이 노년에 접어들 무렵의 일이었고, 무엇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겸재가 선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사천이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비의 그림에는 선비 그림만의 어법이 있으니, 겸재가 사천의 지도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우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겸재가 함부로 붓을 놀린다며 ‘방자하다’ 하고, 자신에게 선비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지도 편달을 부탁하더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은 자신이 겸재를 선비화가로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떠벌린 격이니, 이를 우정이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사제師弟 간의 언사에 가깝지 않을까?

저자에 의하면 사천이 겸재에게 선비의 그림을 가르친 주된 이유는 노론의 정치적 메시지를 은밀히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자 했기 때문이었고, 겸재 또한 이를 알면서 사천의 지도를 받아들인 것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거의 대부분 사천 이병연의 제화시와 함께하고 있다. 누구보다 겸재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며 함께했던 당대 최고의 시인이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대하여 언급한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인 만큼, 겸재의 산수화를 보기 위해서는 사천의 제화시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겸재의 진경산수화와 함께하는 사천의 제화시를 해석한 기존의 해석들은 하나같이 풍경 묘사 일색이다. 이런 까닭에 겸재의 진경산수화 또한 실경을 바탕으로 한 개성적 작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겸재의 금강산 그림들을 어떤 각도에서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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