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반도체’ 닥종이 기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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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반도체’ 닥종이 기술문화사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6.1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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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 이정 지음 | 푸른역사 | 404쪽

 

대영박물관, 바티칸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등 세계 굴지의 박물관에서 문화재 복원에 우리 전통 한지를 쓴다는 이야기는 이제 구문舊聞이다. 길고 복잡한 닥섬유로 만들어진 한지는 얇고 잘 찢어지는 다른 종이와는 달리 두껍고 튼튼해 문화재 복원계의 슈퍼스타라는 평가를 받는단다. 하지만 우리는 내구성이 1,000년 이상이라는 닥나무로 만든 닥종이, 전통 한지에 대해 잘 모른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물론 우리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무심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잊혔던 닥종이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냈다. 제지 과정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록은 물론 의궤儀軌, 등록謄錄 등 다양한 사료를 섭렵해 가며 한지를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를 짚어냈다.

저자가 꼽은 전통 한지 제조 비법의 핵심은 종이를 쌓아놓고 다듬이질하듯 두드리는 도침搗砧이라는 마무리 과정이었다. 조선에서만 시행된 도침법을 거친 닥종이는 광택, 밀도, 먹의 스밈, 방수 효과 등 품질이 뛰어나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모았다. 이에 따라 명·청은 주요 조공품으로 막대한 양의 종이를 요구해 전체 방물 예산의 3분의 1이 종이 관련인 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1425년에는 명 황제가 세종에게 ‘종이 만드는 방법을 적은 글’을 바치라 요구하기도 했으며, 역시 세종 때인 1420년엔 후지厚紙 3만 5,000장을 바치며 금은의 조공 양을 줄여달라고 청했을 정도도 한지의 가치는 컸다. 그런가 하면 도침은 군역은 대신할 정도로 고된 일이었기에 조선 후기에는 장인 중 가장 높은 공임을 받는 고급 기술이기도 했다.

도침과 더불어 저자가 전통 한지의 과학기술사에서 주목한 것은 휴지休紙·환지還紙라는 친환경적 재활용술이다. 한 번 쓰고 난 종이를 가리키는 ‘휴지’는 오늘날의 쓰레기 취급이 아니라 ‘돌아온 종이’ 환지가 되어 신발, 삿갓은 물론 북방을 지키는 군사들의 갑옷, 새색시가 타고 가는 가마 안의 요강으로 다시 태어났다. 면화를 키울 수 없었던 북방의 백성들은 과거시험 낙방자들의 답안지인 낙폭지 외투가 솜보다 낫다고 반겼으며, 군기감은 쇠사슬로 만든 갑옷보다 가볍고 방호 효과가 뛰어나다며 종이 갑옷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휴지 확보에 비상이 걸려 세초洗草한 실록의 초고와 지방에서 공린 재실災實 장계까지 활용했다. 이 와중에 지방에서 실시된 과거시험의 낙폭지를 모두 서울로 보내도록 했는데 1705년에는 낙폭지 수송량이 적다는 이유로 한 시험관이 일종의 ‘휴지 횡령죄’로 파면되는 등 휴지는 청렴한 관료제 확립에 기여하기도 했다.

저자가 파악하기로 종이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는 버팀목인 한편, 정치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불씨이기도 했다. 조공품으로 대중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15세기에 백성에게 유교적 덕목을 기르기 위해 《삼강행실도》와 불경 등 다양한 간행사업을 추진하느라 종이 공납 수량이 껑충 뛰고 세종이 《자치통감》 인쇄를 위해 100만 장을 조지서에 배정하며 지장紙匠이 아닌 승려에게 옷과 음식을 주고 종이를 뜨게 한 것도 종이의 국가적 비중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과거시험을 치르는 유생들의 두껍고 좋은 종이를 고집하자 금령을 내리고 1702년엔 두꺼운 종이를 쓴 장원급제 답안에 대해 왕이 자격을 박탈한 사실에서는 종이가 사회 변화의 한 나침반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지역紙役에 시달린 승려들이 절 비우기, 격쟁, 상소 등으로 저항하거나 조선 후기 화전민, 거사, 송상松商이 손을 잡고 국경을 넘는 시장을 개척한 사례를 통해 변화의 물결을 보여준다.

저자는 닥종이의 기술문화사를 단선적으로 살핀 것이 아니다.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자의 ‘과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조선의 ‘닥종이 연대’가 발휘한 기지를 추적해 사물과 오랜 시간 함께하는 새로운 과학기술과 노동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덕분에 이 책은 과학기술사 이상의 과학기술사로 자리매김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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