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의 흥망성쇠와 성공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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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흥망성쇠와 성공방정식
  • 김범철 충북대·고고학
  • 승인 2023.06.1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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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잉카(Inka 또는 Inca)는 우리에게 마추픽추, 신비한 황금 문명 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문명’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석연치 않다. 잉카가 제국(1438∼1533년)으로 성장하는 시기는 우리의 조선시대와 겹친다. 조선은 퇴계와 율곡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들의 사상으로 여전히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잉카를 대단한 문명인 양 추켜세우기는 다소 낯간지럽다. 페루 학자들도 잉카를 ‘삼무(三無)’로 표현한다. 수레바퀴, 분절적 문자체계, 금속기(특히, 철기) 등 일반적으로 문명과 도시를 규정하는 물적 기준이 불비하거나 소략하다.

그러나 ‘팔매와 곤봉으로 제국을 건설’하였던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단순하고 다소 선정적이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듯 물질적 불비에도 불구하고, 급속하게 영토를 확장하면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를 얘기해보자.

먼저, 왕위 계승에 작동했던 분파주의(factionalism)를 들고 싶다. 사실, 서구 고대사와 고고학에서 잉카의 왕가는 그 중요한 사례로 거명된다. 분파주의를 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은 ‘파이 나눠 먹기’다. 커다란 테두리 내에 공존하는 분파의 최대 관심사는 분파의 이익일 뿐 테두리를 구성하는 전체 공동체의 성장이나 안녕은 아니다. ‘고모이자 이모인 어머니’, ‘삼촌이자 외삼촌인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우스개 삼아 표현하듯, 잉카 왕가의 근친혼은 유명하다. 그 결과, 혈족을 중심으로 한 패거리에 어떤 정서적, 도덕적 벽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삼촌인데 남의 편을 들다니!” 같은 말은 필요가 없다. 누구를 지원하던 다 혈족이고 식구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분파 이익만을 좇기에 최적의 토대가 되는 셈이다. 좋은 말로는 역동적이었겠으나,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합종연횡이 난장판이었다. 왕가의 이합집산에 지방 세력의 줄서기까지 더하여 잉카의 왕위 계승은 진정 복마전이었다. 경쟁이 치열했던 만큼 그 보복 또한 극악했다. 패배한 세력의 학살은 물론, 대규모 강제 이주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고래의 안데스 전통에 기초한 잉카 왕가의 상속방식도 제국으로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새로이 등극한 왕은 아버지 왕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분파를 유지함으로써 정적들의 발호를 막고 권력을 강화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새로운 땅이 필요했고 정복 전쟁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영토 확장의 원동력이자 상속 방식과 분파주의의 접점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두 기제(mechanism)가 스페인 군대의 침략을 받았을 때, 오히려 독이 되어 멸망을 재촉했다는 점이다. 한때 군대라기도 어려울 잔당 수준의 무리를 이끌었던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8∼1541년)가 스페인 왕으로부터 200명의 군사를 더 받아 귀환했을 때, 잉카제국의 마지막 두 왕인 우아스카르(Huáscar, 재위: 1527∼1532년)와 아타우알파(Atahualpa, 재위: 1532∼1533년) 형제는 한창 격렬한 왕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스페인에서부터 정치적 암투에 능했던 피사로는 1526년 처음 잉카에 온 이래 몇 년의 관찰을 기초로 이 형제 간 싸움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잉카가 동원할 수 있던 군사는 5만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무리한 영토 확장에 따른 지방의 반감이 잉카의 군대 동원을 어렵게 했고 스페인 군대가 아무리 중무장했다고 해도, 200명 정도에 정복당했다는 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피사로로서는 군사·정치적 모략의 승리였고 잉카로서는 분열의 패배였다. 물론, 스페인인들이 퍼뜨렸다는 천연두도, 엘리뇨 같은 기상이변도 잉카 멸망에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역사학이나 고고학 전문가들은 과도한 분파주의적 경쟁이나 무리한 영토 확장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 시쳇말로 하자면, 그 두 기제는 ‘한때의 성공방정식’일 뿐이었다.

요즘 여기저기서 과거에 재미를 보았던 방식을 고수하려다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본다. 그래서인지 이 말은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특히 정치권에서 더 그러하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다. 쏟아지는 뉴스를 보면서 그들이 ‘표변(豹變)’의 교훈을 새기면 좋지 않을까 싶을 때가 적지 않다. 가끔, 말을 바꾼다고 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원래는 주역(周易)의 “대인호변(大人虎變) 군자표변(君子豹變) 소인혁면(小人革面)”에서 온 말로, 군자는 잘못을 고쳐 표범의 털처럼 아름답고 선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의미다. 지도층에게 자기혁신이나 변화 도모의 필요성은 물론, 그 방향의 중요성도 함께 일깨우고 있다. 아름답고 선하게…. 방향성 외에 속도와 같은 다른 변수도 있는바, 혁신과 변화를 도모하는 일이 실상에서는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변화의 문턱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도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변수들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고 바꾸는 데에만 몰두하면, 변화의 추구마저 교조주의나 맹신이 되고 만다는 점은 분명하다.


김범철 충북대·고고학

       혁신의 표상으로 자주 거명되는 돌궐 재상 톤유쿠크(Tonyuquq, 646∼726년)의 비 앞에서 (2019년)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박물관장. 한국 청동기시대 문화와 선사시대 정치경제에 관심을 둔 고고학자이다. 『쌀의 고고학』(2011년), 『한국 청동기문화 개론』(2015년), 『가옥, 가족, 가구』(2018년), 『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2021년), 『생물고고학』(2022년) 등 다수의 저·편·역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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