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정치와 테크노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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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정치와 테크노포퓰리즘
  •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 승인 2023.06.14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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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운택 칼럼]

정부가 교체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 정부를 상징할만한 시그니처 정책이라는 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포스트 코로나19 시기는 경제와 사회의 불안정성을 극복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임에도 현 정부의 국정목표 1은 “상식이 회복된 반듯한 나라”라는 이해하기 힘든 목표가 내세워졌다. 정부의 목표가 상식을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개념을 국정철학이라고 내세운 분들은 아마도 상식의 잣대가 한 사회의 절대적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이해하는 상식의 세계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유감스럽게도 한 사회의 하위영역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어 소위 상식이라는 잣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과 환경에 따라 구성적이고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학문적’ 상식이다. 민주화 이전과 이후에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때 정치가 무엇을 하느냐에 상식의 현재적 수준이 결정되므로 상식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이익정치를 추구하면서도 공적인 기능을 배제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 다수를 안고 갈 때 어떤 상식의 수준에 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가치’를 내세우되, 소통과 설득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 대신 특정한 상식을 회복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자신만 이해하는 상식’의 정치를 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상식의 회복이 지난 1년간 대통령실이 보여준 일관된 자세, 즉, 모든 국정기조는 전임 정부의 정책 뒤집기라는 걸 의미한다면, 더욱 걱정스럽다. 전임 정부의 통치행위가 모두 비상식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지지자를 향한 정치적 행위는 될지 몰라도 곧 5년 단임제 아래 정부 존재방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위이다. 즉, 이는 4년 뒤 본인들의 통치행위가 다시 송두리째 부정당할 각오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참으로 단견의 극치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서 보듯 정치변동의 대세에 휩쓸려 자당의 국회의원이 침몰하는 배에서 빠르게 이탈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줘, 온 국민이 권력의 무상함을 경험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기시감이라고도 할 것 없이 수년 내에 그냥 익숙한 장면이 상상된다.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앞세운 불법과 합법의 양극단에 기초한 상식의 정치는 검찰의 자극적인 정치적 수사학, 정적에 대한 프레임 씌우기 등에 익숙한 특정 집단의 가치를 대변할 뿐이다. 이러한 정치가 더 우려되는 것은 그러한 ‘상식’이 사회의 공동선은 물론 사회의 일반적 가치와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국정운영을 이렇게 이해하다 보니 국가정책이라는 것이 설익은 포퓰리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깜짝쇼가 가장 대중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정부가 내놓은 대표적 정책이라는 것이 만5세 입학정책, 주69시간 노동정책, 건설노동자 건폭몰이에 이은 야당· 시민노동단체 잠재적 범죄집단 낙인찍기 등이다. 

그럼에도 흔히 말하는 이번 정부의 ‘검찰통치’보다 더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포퓰리즘의 추진자들이 무능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이 통치집단이 그러한 정책을 설계할 테크노크라트들과 철저하게 공생한다는 점이다. 기술관료로 알려진 테크노크라트들은 일반관료(공무원)와는 다른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 집단을 의미하고 대체로 학계나 연구소, 민간 씽크탱크에 소속되어 있다. 한편,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시험을 통해 자격과 권능을 부여받는 한국의 고위공직자들 또한 정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책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테크노크라트와 그 기능을 분리하기 어려워 나는 이들을 일란성 쌍생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정책의 형성과정에서 한쪽은 정책 이슈를 취사선택하고, 다른 한쪽은 그러한 선택된 정책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양자는 공생관계에 있다. 이 정부의 노동개혁을 주도한다는 노동부의 엘리트 관료와 ‘미래노동시장위원회’의 관계를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 모두 절대권력이 하사하는 인센티브(임명, 승진, 보상)에 취약한 계층이라는 점에서 꽤 닮아있다. 

사실 테크노크라트들은 생래적으로 포퓰리즘을 경멸한다. 그러나 오래전 그중 일부가 노골적으로 ‘개돼지’로까지 표현했듯, 특정 기술관료들은 대중의 의지와 능력에 근본적인 불신이 있고, 어차피 정치의 진실은 사회의 공동선과는 달리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류라는 점에서 포퓰리즘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통치행위로서 정치가 실종된 상태에서 이제 포퓰리즘과 테크노크라시의 기묘한 결합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는 우리만의 현실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의 통치가 불안정해진 오늘날 소위 트럼프 현상에서도 확인되듯 권위주의 통치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커톤과 악센티와 같은 정치학자는 이를 테크노포퓰리즘(Technopopulism)으로 규정한다.

대한민국에서 엘리트 기술관료들은 역설적으로 민주화 과정의 진정한 수혜자가 되었다. 과거 독재정권 시기에 각하의 면전에서 척추뼈 하나 정도 나간 사람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하례하던 소위 기술 관료들이 시험 능력주의, 학맥, 인맥을 앞세워 문민정부의 요직을 채워나갔다. 전임정부에서 임명된 경찰총장이 보수정부의 대통령이 되고, 진보정부로 명명되던 정부에서 총리를 한 분이 보수정부의 총리가 다시 되고, 마찬가지로 전임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정책을 담당하던 고위 공직자가 보수정권에 안기는 태도가 일반 시민의 생각과 달리 이들 집단에게는 하등 문제가 안 된다. 이들 한국의 특정 테크노크라트들은 능력주의의 기치 아래 실종된 정치, 무능한 정치의 동맥과 정맥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정치의 노를 누가 잡든 개의치 않았었다. 실종된 정치가 한 방을 원하면 정치적 진실을 찾아 국가개조와 혁신의 처방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선거판만 벌어지면 구직활동에 어려움이 없었다.

최근 이들은 승진의 난맥을 이유로 자신들이 국가를 통해 익힌 기술을 기업에서 활용하겠다고 기업으로의 이직을 당당하게 감행하고 있다. 목구멍이 굳이 포도청이 아닌 자들이 뻔뻔하게 로비스트로 살아가겠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공무에서 강탈당한 영혼이 돈에는 어찌 그리 빨리도 스며드는지 대한민국 교육자본의 수준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행위를 정치가 두고 보는 작태도 한심하다. 국민이 개돼지로 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테크노포퓰리즘은 민주화 과정에서 통치자의 개성과 인성에 의존한 위임민주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환상이 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이다. 사회권력으로부터 정치의 실종이 크면 클수록 테크노포퓰리즘의 폐해는 커질 수밖에 없다. 탄핵의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권력을 정치권에 위임했던 촛불시민이 뼈아프게 되돌아볼 지점이다.


임운택 편집기획위원/계명대·사회학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사회학 박사.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한국이론사회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편집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하였고,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을 맡은 바 있다. 주 연구분야는 정치경제학, 노사관계, 정치사회학, 현대 사회이론이다. 주요 저서로 <전환시대의 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위기>, <경제의 디지털화와 노동의 미래>,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문화, 환경, 탈물질주의 사회정책>, <청년실업과 노동시장, 그리고 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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