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 우리의 목소리 - ‘목소리 프로젝트’ 3탄 〈백인당, 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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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 우리의 목소리 - ‘목소리 프로젝트’ 3탄 〈백인당, 태영〉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3.06.12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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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음악극 <백인당, 태영>(장우성 작/작사, 이선영 작곡/음악감독, 박소영 연출, 재단법인 우란문화재단 제작,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2023. 5.19~6.18)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1914~1998)을 다룬다. 1920년 7세 시절부터 1980년대 말 노년까지, 이태영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풀어 놓는다. 공연은 극적인 사건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간을 역전시키지도, 스펙터클한 무대 장치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두 명의 배우들은 칠판 재질로 뒤덮인 소극장 전체에 분필로 무언가를 쓰고 지우며 자유롭게 시공간을 설정함으로써 극의 흐름을 만들 뿐이다. 무대 상수에 위치한 밴드 구성도 흥미롭다. 소극장 뮤지컬이 정서의 몰입을 위해 주로 사용하는 클래식 현악기 대신, 여러 종류의 타악기와 기타가 리드미컬한 음악적 색채를 만든다.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지치지 않는, 발랄한

<백인당, 태영>은 ‘기념의 미디어’로 환원되지 않는 음악극이다. 주인공 이태영이 기념되어야 할 ‘위인’이 아니라 발견되고 복원되어야 할 ‘인물’이라는 작품의 관점은 전기적 사실을 ‘기념의 프레임’으로 추상화시키지 않는 공연 태도에 근거한다. 이태영은 호주제 폐지를 포함한 가족법 개정을 이끌어낸 인물로서 막사이사이상(1975), 유네스코 인권교육상(1982), 국민훈장 무궁화장(1990)을 수상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여성인권운동사에 길이 남을 ‘위인(偉人)’이지만, 공연 속 이태영은 그저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가진 발랄한 ‘태영’으로 묘사된다. 꽤 오랫동안 창작뮤지컬이 역사와 역사적 인물을 중량감 있는 대극장 무대에 담아 ‘기념’해왔음을 떠올리면, <백인당, 태영>의 발랄함과 자유로움은 더 호기롭게 다가온다.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백인당, 태영>은 ‘목소리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목소리 프로젝트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잊혀져가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목소리)를 공연으로 재조명하는 시리즈 프로덕션을 지칭한다. 장우성, 이선영, 박소영 3인의 의기투합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우란문화재단이 프로젝트에 동참함으로써 <태일>(2018)과 <섬>(2019)이 탄생되었다. 두 작품 모두 ‘음악극’ 형식으로 실존 인물(각각 전태일, 소록도의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3탄 <백인당, 태영>은 앞선 두 작품들보다 훨씬 더 거창하게 인물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으나, 공연은 주류 뮤지컬의 관점으로 보면 철저히 작고 미미해 보이는 길을 걷는다. 공연에는 거대한 의상 변화도, 프로덕션 넘버도, 복잡한 무대 기술도, 웰메이드적 지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무엇보다 인물의 이야기가 우선순위에 놓일 수 있도록 수위 조절이 되어 있다. 상업 뮤지컬 프로덕션의 문법과 지향점을 반하는 지점에 공연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공연은 태영의 반짝이는 얼굴과 가벼운 몸을 최전방에 놓는다. ‘나는 딸이오!’를 웅변했던 7세의 태영부터 가족법 개정을 이끌어낸 노년의 태영까지, 태영은 발랄하고 낙천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얼굴을 보여준다. 남편의 옥바라지를 할 때도, 4남매를 키우며 법학 공부를 할 때도 태영의 삶에는 신파적 정서가 배어들 틈이 없다. 목표를 향한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태영이 변호사가 되어 공식적으로 여성인권을 부르짖자, 무대에는 하얀 색의 줄이 하나씩 놓이고 점차 그 줄들은 실타래처럼 꼬여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태영은 결코 지치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다. 줄이 놓이지 않은 또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 발랄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태영의 모습에서,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해야 한다’는 삶의 모토가 읽힌다. 하지만 공연은 이런 태영을 판타지로 다루지 않는다. 태영의 삶에는 느닷없는 구원이란 없으며 오히려 그 삶은 인식과 발견, 고통과 인내로 가득하다. 남편 정일형 역시 태영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그는 태영과 같은 길을 걸으며 때로는 삶의 무게를 더하는 동역자일 뿐이다. 태영이 그토록 원했던 호주제 폐지도 2008년에 와서야 완전히 실행된다. 그래서 태영의 그 발랄한 얼굴은 단순하지 않다. 자신의 목소리에 책임을 지기 위해 에너지를 높이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자의 얼굴이다.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다층적으로 분리되고 또 다시 융합되는 

공연의 형식은 주제 의식과 함께 결정된다. <백인당, 태영>은 두 가지 차원에서 형식적 새로움을 보여준다. 먼저 ‘음악극’이라는 양식이다. 일반적으로 뮤지컬은 음악(넘버)과 대사가 서로 스며들 듯 붙어서 장면을 완전하게 구성하는 방식을 지향한다. 형식적 층위에서 ‘좋은 뮤지컬’에 대한 기준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백인당, 태영>의 창작진은 공연을 ‘음악극’으로 호명함으로써 의식적으로 밀도 높은 뮤지컬의 구조를 거부한다. 전체 넘버는 10개로 한정되어 있으며 리프라이즈(반복) 넘버를 빼면 10개가 채 안 되는 분량으로 공연을 구성했다. 이는 대사의 비중이 음악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배우들은 여러 역할을 넘나들며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때로는 과장된 보컬로, 때로는 리드미컬한 보컬로 넘버를 해결했다. 무대 위에 밴드를 노출시켜 음악적 수행이 이루어지는 전 과정을 관객이 지켜보게 만든 것 역시 구조적인 밀도를 낮추는 데 일조했다.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공연의 다층성과 연관되어 있다. <백인당, 태영>은 2인극이지만 동일 층위에 다양한 목소리를 배치함으로써 2인이 물리적으로 구현할 수 없는 여러 인물을 동시에 등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생각과 말 그리고 서술자의 이야기까지 한 층위에 놓는다. 따라서 배우는 서술자로서 이야기를 전달하다가 곧바로 캐릭터가 되어 극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극 안에서는 인물의 말과 생각을 하나의 흐름으로 발화해야 하는 유연성과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배우가 자연인 배우로서 관객과 마주하는 순간도 있다. 이태영을 소개하고, 복잡할 수 있는 공연의 형식을 설명하며, 이태영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를 코멘트하는 장면이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다. 이때 배우는 연기를 멈추고 극에서 빠져나와 마치 토크 콘서트를 진행하듯 관객에게 말을 건다. 이러한 모든 시도는 목소리 프로젝트의 지향점을 그대로 담는다. 이태영의 목소리, 그녀의 이야기가 공연에 선명하게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사건의 흐름에 인물을 희생시키거나 연기 외적인 요소가 배우를 가리는 대신, 단순하고 명확한 무대 콘셉트 위에 인물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배우 이봉련과 이현진은 진중하고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이러한 공연의 목표와 기획 의도를 훌륭하게 구현했으며 명확한 콘셉트로 공연의 흐름을 유연하게 만든 연출의 아이디어 역시 돋보였다.
† 이봉련은 태영과 그 외의 인물을 연기했으며 이현진은 서술자와 극중에 등장하는 수많은 다른 배역들을 전부 소화했다. 각각 백은혜, 이예지가 더블 캐스팅 되었다.

 

사진= 우란문화재단 제공

공연의 말미에 이태영의 목소리는 결국 현실이 된다. 그 안에서 ‘각오 단단히 하라’는 은사 정광현의 목소리와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하라’던 어린 시절 은사의 목소리가 함께 울린다. <백인당, 태영>은 ‘우리의 목소리’가 더해질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목소리 프로젝트의 최종 종착지는 아마도 여기에 놓여 있을 것이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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