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국민국가의 부적절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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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국민국가의 부적절한 관계
  • 전진성 부산교육대학교·독일 지성사
  • 승인 2023.06.1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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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쿠스]

인권은 문자 그대로 모든 인간의 권리인가? 프랑스 대혁명의 출발점이 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인간을 시민 내지는 국민에 국한시키고 그 울타리 밖에 놓인 사람들을 일종의 ‘비인간’으로 배제했다는 사실은 이미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한 정치체제인 국민국가는 절대왕정이 도입했던 ‘주권’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고 그 외연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인권’이라는 개념을 활용했다. 인권 선언의 축성을 받으며 새로운 주권자인 국민이 등극한다.

주지하다시피 인권은 18세기 서구의 정치 담론에 혁명적 폭발력을 가져다준 ‘자연권’ 사상의 색다른 표현이었다. 자연과 인민을 동일시한 루소의 급진 공화주의 사상이 말해주듯이 자연권은 입헌주의적 자연법 논리를 뛰어넘어 기성 정치질서의 정당성을 뿌리째 흔들며 좀 더 원초적인 정당성에 뿌리박은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출현을 알렸고 이제 대혁명의 화염 속에서 ‘자연의 정당함right’이 ‘인간의 정당함’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처럼 서구적 의미의 인권은 국민국가의 정치적 정당화를 위해 도입된 개념적 장치로서 그 실질적 기능과 모호한 어법 간의 분열을 피할 수 없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권리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국민국가 내의 구성원 자격을 지닌 국민(=시민)만의 권리라는 피치 못할 모순은 인권이 국민국가 특유의 배타적인 주권 논리에 연루된 데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인권의 분열상은 근대 국민국가의 자기모순에서 비롯된다. 봉건적 유대로부터 떨어져 나온 원초적 생명으로서의 개인을 발판으로 도약한 국민국가는 주권자인 국민의 명령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을 부정한다. 이때 동원된 인권은 개인의 자유와는 무관할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억압하는 데 기여했다. 우파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Francois Furet)의 주장에 따르면, 프랑스혁명기에 인권의 이름으로 자행된 테러, 즉 국가폭력은 “국민이 개인에 대해 치룬 전쟁”이었다. 국민국가가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개인은 자기 위치를 배정받게 된다. 그나마 좁은 자리마저 얻지 못한 나머지는 곧 ‘비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여타의 어떠한 속성으로도 ‘나누어지지 않는’ 일체화된 정체성을 지닌 개인individual이란 자율적 존재이기는커녕 주권자인 국민의 역상(逆像)으로, 기존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무력화하는 국민국가의 주권이 빚어낸 정치적 효과이다. 철학자 헤겔이 내세운 ‘국가 안에서의 자유’ 혹은 ‘자유의 현실태로서의 국가’는 단순히 국가주의의 표현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법철학 강요』에서 헤겔은 이러한 문제를 ‘정치적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열, 또는 ‘공민citoyen’과 ‘시민bourgeois’의 분열이라는 개념적 틀에 담았다. 물론 이 프로이센 공무원은 ‘인륜적 국가’라는 논리적 연금술을 통해 난제를 자족적으로 해소해버렸다.

헤겔식 개념 틀을 바탕으로 인권의 자기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든 저작이 바로 칼 맑스의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이다. 맑스 특유의 비판적 시각으로 볼 때, 유대인의 정치적 해방이란 기껏해야 부르주아 사회의 에고이즘을 해방시킨 것에 불과했으며 이른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해방과는 무관했다. 헤겔식의 정치적 국가가 성취한 해방은 인간 해방을 전혀 담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령 정치적 국가가 종교로부터 해방되었어도 종교가 담보해주는 구조들이 존속하는 한, 그것은 여전히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맑스는 유대인 해방이라는 이슈가 전도시킨 현실, 즉 근대적 국민국가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가 볼 때 정치적 국가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국민주권/인민주권의 이념은 사회적 차별을 탈정치화하고 신비화할 뿐이다. 맑스의 논리는 철학적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네이션과 미학』에서 말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보로메오의 매듭”을 연상시킨다. 국민국가와 시민사회는 대립관계이기는커녕 일종의 ‘암수한몸’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국가기구를 유산 계급의 이해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로 보는 맑스의 전형적 관점으로 읽힌다.

그러나 인권과 공민권 간의 도착된 관계를 지적하는 구절은 조금 다르게 읽힐 여지가 있다. 맑스는 유대인에게도 공민권을 부여하라는 요구가 실은 국민주권을 통해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 사적 개인의 권리를 요구한 것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공민으로서의 정치적 권리 대신 그저 생명유지 활동에 전념하는 개인의 축소된 권리가 바로 인권이다. 맑스는 인권을 진정한 인간 해방이 아니라 그저 에고이즘의 해방, 즉 사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매우 협소하게 평가하긴 하지만 그것을 국민주권과 대립하면서도 화합하는 분열태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사안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인권은 정치적 국가에 철저히 포섭되어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마땅한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지 못한 채 개인의 독자적 권리를 찾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앞서 설명했듯이 서구의 인권 개념은 언뜻 자율적인 개인의 권리로 보이지만 실은 오히려 그 정반대편에서 테러를 통해 성장하던 국민국가의 자기정당화 논리였다. 물론 인권의 위치는 늘 불안정했는데, 인간 모두의 권리라는 문자 그대로의 뜻이 개개인의 자기주장을 가로막고 있던 국민주권의 장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점차로 틈새를 벌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인권은 근대 국민국가의 분열을 나타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국민국가의 공고함이 위협받을수록 인권의 탈선은 심화된다. 어느덧 이주민, 난민, 여성, 빈민, 장애인, 어린이,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그 밖의 각종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주권의 담벼락을 넘어서는 현상이 비일비재해진다. 그들의 아우성은 곧 담을 뚫고 무너뜨릴 기세다. 프랑스 인권선언이 억지로 결합시켰던 시민과 인간은 결국 분리되고 만다. 그리고 권리 없는 (비)인간들, 한낱 생명체들이 인간의 권리를 얻는다.

국제적 냉전이 종식된 20세기 말엽에 등장한 이른바 ‘인권체제human rights regime’는 더 이상 서구의 인권 이념에 기대지 않는다. 국민국가 중심의 국제질서를 뛰어넘는 이 새로운 정치체제는 옛 프랑스혁명기의 권리선언에 못지않게 혁명적인 권리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의 ‘역상’이 아니라 그 ‘외부’로서의 개인이 주장하는 권리다. 서구 개인주의의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는 개인들이 오로지 인간이라는 류(類)의 자격으로 주장하는 권리/정당함은 국민 다수의 표심과 국익에 휘둘리는 기성 정치에 맞서 새로운 지구적·지역적 연대와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모두)의 권리라는 모호한 어법이 낳은 치명적 결과는 무엇보다 국민국가와의 결별이었던 것이다.   

 

전진성 부산교육대학교·독일 지성사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독일 근현대 지성사와 문화사, 역사이론이다. 『서독의 구조사학』(독어본),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일역, 영역), 『인권의 발명』(역서)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연구논문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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