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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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장애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6.1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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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 | 낸시 J. 허시먼·바버라 아네일 엮음 | 김도현 옮김 | 후마니타스 | 632쪽

 

이 책은 장애와 관련된 쟁점들을 정치이론의 접근법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이 책을 엮은 바버라 아네일과 낸시 J. 허시먼은 정치이론 분야의 손꼽히는 학자들을 모아 홉스에서부터 로크, 칸트, 롤스, 아렌트에 이르는 권위 있는 인물들의 저작을 통한 장애의 역사적 분석뿐만 아니라, 자유, 권력, 정의와 같은 핵심 개념들을 검토하는, 현대 정치이론에서의 장애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장애에 대한 정의는 시기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내려졌으며, 또한 사회적·정치적 요구와 필요에 따라 달라졌다. 이런 측면에서 장애는 무엇보다 먼저 개인의 몸에서 나타나는 손상/결함(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으로 정의되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장애는 신의 징벌이거나, 개인적 불운(불행)의 차원으로 환원되었고, 장애인은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은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후 1970년대 중반 이후로부터, 이 같은 의료적 모델에서 벗어나, 장애가 사회적·환경적 장벽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따라서 공공 정책을 통해 해소 가능한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장애에 대한 이 같은 사회적 모델은 장애가 그 자체로 사회적·정치적 차원의 문제라는 인식이 점점 더 늘어났음을 보여 준다.

이런 흐름은 장애에 대한 정의가 개인이 경험하는 신체적·정신적 문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사회적·정치적 차원과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는 장애에 대한 정의가 사회적 재화(가치)나 복지의 권위적 배분과 맞물려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렇다고, 장애를 사회적·정치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외려 이 같은 환원은 치료나 재활, 특정 기술(말하자면, 장애가 있는 개인들이 더 넓은 사회에 잘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을 과도하게 특권화함으로써, 장애인을 더욱 주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애를 사회적·정치적으로만 구성하는 것은 장애를 비실제적인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장애인들을 비실체화하고,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장애를 바라보는 의료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살피고, 최근 등장하고 있는 신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적 관점에서 장애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역설한다. 이와 관련해 장애에 대한 상호작용적 이해가 장애 인권 관련 국제기구와 문서에서 먼저 등장했던 반면, 정치이론은 이 같은 변화와 흐름에 뒤처져 있는 현실이고, 이에 따라 정치이론이 외려 장애를 만들어 내는 언어적 환경의 일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 부정적인 언어(결함 같은)의 사용과 장애에 대한 귀속적 원인(불운, 불행 같은)의 상정을 통해서 ― 은 아닌지 묻고 있다. 나아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이론이 평등과 자유라는 핵심 개념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서, 시민권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 속으로 장애인을 완전히 포함하는 긴 여정을 시작할 수 있기를 촉구한다.

또한 이 책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의 근간을 설정한 중요한 정치사상의 고전들 역시 근대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비장애인 주체를 정의하기 위해, 장애인에 대한 정의를 활용해 왔으며, 이를 통해 비장애인들을 정치적 주체에서 배제해 왔음을 명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런 비장애중심적 정치이론에서 장애인은 사회적 분업과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사회적·정치적 주체에서 배제되었다. 예를 들어, 롤스의 경우, 일차적으로 도덕적 행위 주체의 ‘정상적인’ 지적 능력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기 위해 장애를 소환한 후, 이차적으로 사회 성원권과 정의에 대한 요구권에서 장애인을 배제하는데, 이 같은 ‘이중적 부인’(도덕적 행위 주체에 대한 부인, 사회 성원에 대한 부인)을 통해 롤스는 의도적으로 근대적·합리적 주체의 범주에서 장애 정체성을 누락시키고 있다.

첫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1장부터 4장까지의 내용은 모두, 근대 서구 정치이론 내에서 이루어진 장애에 대한 과거 및 현재의 정의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문제적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나아가 이 같은 문제적 정의들이 장애인의 정치적 권리 및 성원권과 관련해 대단히 심각한 결과로 이어짐을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는 정치이론의 핵심 가정들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이를 시급히 재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을 이루는 5장부터 11장까지의 논의들은 장애가 현대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방법을 보여 주며 가능한 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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