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이 살아남는 법, ‘혁명이냐, 개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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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이 살아남는 법, ‘혁명이냐, 개혁이냐?’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6.10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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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널리즘 선언: 개혁이냐, 혁명이냐 | 바비 젤리저·파블로 J. 보즈코브스키·크리스 W. 앤더슨 지음 | 신우열·김창욱 옮김 | 오월의봄 | 168쪽

 

오늘날 저널리즘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후퇴 중인데, 이 사회의 더 나은 공공선을 위해,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저널리즘은 기여하고 있는가? 이 책은 전 세계 저널리즘이 위기에 빠진 원인을 선언문 형식으로 날카롭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개혁 혹은 혁명’ 노선이다. 두 노선 중 어느 하나를 받아들여야만 저널리즘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두 노선의 차이는 저널리즘의 근본에 깔려 있는 정치 지향인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당대의 민주주의에 충실하게 재결합된 포괄적이고 일관성 있는 명백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말한다.

저자들은 ‘개혁 노선’을 따른다면 저널리즘의 제도적 근본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더 선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저널리즘은 자유주의적·민주적 통치를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이 노선을 따른다면 저널리즘이 우선시할 엘리트는 더 이상 반자유주의적 성향의 엘리트, 자신의 이익과 집단만을 대변하는 지식인, 고위직 엘리트가 아닌 역사적으로 권리를 박탈당해온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들일 테고, 따라서 뉴스가 전하는 목소리는 확장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 노선은 ‘사회정의’를 필수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저널리즘을 추구한다. 또한 불의와 불평등의 발생을 단순히 목격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그 상황을 수정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렇게 개혁 노선의 저널리즘은 자신을 만들어낸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정치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이를 개선하는 데 힘을 쓴다.

‘혁명 노선’은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해방적인 정치 해결책을 다채롭게 모색하는 길이다. 부의 집중, 빈곤 문제, 생태 문제, 소수자 문제 등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여러모로 한계에 봉착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대안들이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저널리즘적 상상력을 제한해 저널리즘을 협소한 위치에 머무르게 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 그 너머를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혁명의 길은 엘리트가 전혀 없는 저널리즘, 이상적 규범을 거스르고 현장에서의 쓸모를 최우선으로 하는 저널리즘, 모두를 위한, 하지만 특히 오랫동안 주변부에서 뉴스를 읽고 보고 들어온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저널리즘을 지향한다. 

세 저자가 지적하는 저널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언론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저널리즘이 사회와 조응하지 못하고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저널리즘이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세 가지 접점, 즉 엘리트, 규범, 수용자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 접점을 오독하고 방치한 나머지 저널리즘이 위기에 빠졌다는 진단이다. 

저자들은 저널리즘의 신뢰가 하락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엘리트’ 시스템에 있다고 말한다. 지금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저널리즘은 주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엘리트가 된 기자가 엘리트로부터 얻은 정보를 엘리트 수용자에게 전달할 뿐이다. 하지만 이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는 엘리트 시스템은 이미 대중의 신뢰를 잃은 상태다. 그런데도 저널리즘은 이 엘리트 시스템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계속 의존하고 있다. 저자들은 저널리즘 관행에서 엘리트들을 떼어내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정확성, 공정성, 독립성, 객관성 등 저널리즘이 신봉해온 ‘규범’은 또 어떤가? 안타깝게도 규범은 현장에서의 취재 행위와 따로 놀기 일쑤여서 유의미한 지침이 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차별’에 대한 규범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뉴스룸에는 인종주의, 성차별, 여성혐오, 계급 편견, 외국인혐오, 동성애혐오 등이 난무하고, 이것이 기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의 취재 행위와 따로 놀기 일쑤인 규범에 집착하는 바람에 오늘날 언론인들은 “역사책이나 기념 회고록”에 어울리는 존재가 됐다는 게 저자들의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처리한 정보의 최종적 도달지로서의 ‘수용자’는 이미 저널리즘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기성 저널리즘은 독자가 그냥 당연히 따라붙는 존재인 것으로 ‘가정’했다. 엘리트로부터 얻은 정보를, 엘리트인 자신들이 선별하여 제시하면, 대중 독자들이 그걸 그대로 수용할 거라고 전제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내용물의 생산과 전달을 담당하는 매체가 소수에 의해 과점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저자들은 이 세 가지 접점을 다시 살피고 재규정해야 저널리즘이 사회와 다시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개혁 노선을 따르려면 사회정의의 증진을 위해 세 접점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혁명 노선을 따르려면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 세 접점을 급진적 변화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언론인들이 모두를 위해, 특히 소외된 공동체를 위해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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