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지식의 역사, 과학과 문화의 지리학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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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의 역사, 과학과 문화의 지리학을 읽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6.1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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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 | 바이얼릿 몰러 지음 |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428쪽

 

‘태초에 그리스가 있었고, 그다음에 로마가 있었고, 그다음에 르네상스가 있었다.’ 서구 문명의 역사는 흔히 이런 식으로 서술되곤 한다. 이 책은 서기 500년경부터 1500년경까지 천 년에 걸친 과학과 지식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역사 서술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이 책에 따르면, 서구 세계의 토대가 된 지식은 고대 그리스에서 근대로 건너뛴 것이 아니라, 중세 천 년의 분투 속에서 보존되고 분석되고 혁신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는 지적 문화적으로 활발히 교류했으며, 특히 아랍 학자들의 눈부신 성취가 지식의 전승과 혁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중세 지식의 지도를 효과적으로 그리기 위해 저자는 ‘과학(책)’과 ‘도시’라는 두 축을 교차시킨다. 즉 고대 그리스 과학을 대표하는 유클리드(수학), 프톨레마이오스(천문학), 갈레노스(의학)의 저술이 중세 지식의 허브였던 일곱 도시(알렉산드리아, 바그다드, 코르도바, 톨레도, 살레르노, 팔레르모, 베네치아)에서 추앙받고 망각되고 재발견되고 확산되는 여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 여행은 고대의 지식이 중세에 어떤 경로를 밟아 근대에 도달했는지, 아랍 세계와 기독교 세계의 연결망이 문명을 어떻게 성장시켰는지 보여준다.

유클리드,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는 각각 수학, 천문학, 의학에서 지식의 내용과 구조를 설정한 고대 과학의 거인들이다. 이들의 접근법은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의 주춧돌을 놓았다. 저자는 세 학자의 책이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를 거쳐 인쇄물에 이르는 궤적을, 학문의 중심지였던 지중해 인근 일곱 도시를 지나가는 경로를 살펴본다. 이 도시들은 정치적 안정, 자금과 서적의 지속적 공급, 뛰어난 인재 풀, 그리고 무엇보다 타민족과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중세에 그리스-아랍-서구 문화가 조우한 장소였고, 이를 통해 가능해진 협업이야말로 학문 발달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중세 지식과 책들의 지도는 그것을 연구하고 필사하고 번역하고 전파한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뛰어난 사상과 이론을 찾아내고 보존하고 심화하는 데 인생을 바친 학자들,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말고 펴며 옮겨 적은 필경사들, 도서관에 지식을 저장하고 소실될 뻔한 책들의 은신처를 마련한 수도사와 장서가 들, 학문 활동을 후원하고 주도한 군주들, 지식의 전파와 확산에 핵심 역할을 한 번역가, 서적상, 출판업자 들…. 이들이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고 지식의 경계를 확장했다. 몰러는 이 지식 세계의 인물들을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소개한다. 그중에서도 과학의 역사에 공헌한 아랍 학자들의 성취는 경이로울 정도이다.

중세에 이슬람 과학이 이룬 성취와 유산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혔다. 인문주의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를 우상화하면서 이슬람 학자들을 과학의 역사에서 배제하려 했고, 중세에 아랍어 서적을 번역한 유럽의 번역가들도 이슬람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기에 유럽의 부와 권력이 성장하고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은 이슬람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랍 학문을 주변화하고 과거로 밀어 넣는 서사가 형성되었다.

우리가 이 책에서 확인한 중세 지식의 역사, 그리고 오늘날 종교와 문화 간 혐오로 인한 비극은 이 왜곡된 관점을 새롭게 써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세계가 관용과 포용의 정신으로 공존했을 때 인류 문명이 얼마나 풍요롭게 빛났는지, 이 책은 대안적이고 통합적인 시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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