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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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화”
  •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 승인 2023.06.04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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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

‘가치자유 사회과학’, 즉 연구자의 주관적 가치(판단)를 배제한 사회과학은 아직도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신봉하는 신화의 하나이다. 연구 대상에 대해 연구자가 주관적으로 (보고 싶은 대로) 볼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이는 대로) 보라는 그 취지는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연구 대상이 스스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본다는 것은 허구이다. 연구자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선별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즉 연구 대상에 대해 수동적 ‘객관적으로’ 판단을 배제한 채 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주관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을 본다고 해야 정직하다.

그렇더라도 이런 ‘주관적’ 인식이 객관성을 결여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식의 객관성은 주관성의 (불가능한) 배제에 의해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이 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포착하는지에 의해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연구자의 가치판단이 필연적이고 중요하다는 ‘가치개입 사회과학’의 주장이 성립한다. 이것은 가치자유 사회과학 주장과 가치개입 사회과학의 주장에 대해 하나는 타당하고 하나는 부당하다고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성찰을 결여한 단순무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가치자유주의자들은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다수파이다. 이들은 가치개입 사회과학 주장에 대해 주관성과 당파성의 옹호이며 객관성과 과학성의 폐기라고 비난한다. 이들은 연구에서 자신들의 가치판단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당연한 것이라고 ‘자연화’함으로써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과 상이한 가치판단을 주관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공박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단순무지한 ‘오명(stigma)’이 지배 권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판단을 추구하는 연구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폭력 장치로 구실해 왔다.

취임 1년을 맞는 대통령이 이전 정부의 “포퓰리즘과 이념에 사로잡힌 반시장적 정책을 정상화한 것”을 성과로 내세웠다. 이전 정부의 정책이 반시장적이었는지, ‘포퓰리즘’은 이념에 해당하지 않는지 등 언술의 정합성과 적합성은 논외로 하고, 단순 어법으로 대통령의 주장은 이전 정부의 반시장적 정책은 포퓰리즘과 이념에 사로잡힌 ‘비정상적인’ 것이었으며, 현 정부는 포퓰리즘과 이념에서 벗어난 ‘정상적인’ 친시장적 정책으로 전환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친시장 정책을 ‘정상’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은 ‘국가는 소멸해도 시장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기업 중심, 시장 중심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강조하는 대통령의 관점에서는 당연할 것이다. 친시장 정책은 ‘시장 자유, 정부 개입 최소화’로 요약할 수 있을 터인데, 1년 동안 정부의 정책으로 감세정책 이외에는 기억할 만한 것이 없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정부의 ‘최소 개입’도 개입의 한 형태일 뿐이며, 1930년대의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은 ‘적극 개입’을 정부의 역할로 요구했다. 그러므로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덮어둔 채 반시장적 정책을 정상화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시장을 ‘자연화’하는 단순무지를 드러낸다.

친시장 정책을 포퓰리즘과 이념에서 벗어난 또는 자유로운 정책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시장이 더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공정한 경쟁이 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대통령의 관점에서는 당연할 것이다. 이 역설의 바탕에는 이기적인 개별 주체들이 시장의 자유 경쟁을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사회의 발전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친시장 정책도 이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시장 자유주의’쯤으로 부를 수 있는 이념에 사로잡힌 것이다. 물론 시장의 주체들은 자원과 정보와 권력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시장의 자유경쟁은 성립할 수 없다.

포퓰리즘은 대중 영합주의쯤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낙인인데, 포퓰리즘에 사로잡혔다는 비난은 현 정부에 더 적합하다. 포퓰리즘은 사회현실의 단순화와 구성원의 편가르기, 혐오와 배제, 독단적 결정 등을 특징으로 하는 데 지난 1년 동안 적지 않게 목격한 일이다. ‘노동개혁’을 ‘노사법치 확립과 노조 정상화’(!)로 단순화하고, 노동조합 조직률 14%의 상황에서 ‘귀족노조’를 공격하고 ‘건폭과의 전쟁’을 실행하면서 노동자를 분할하고 혐오와 배제의 정서를 자극하는 것은 대표적이다. 이 사례는 영국 대처 수상의 광산노동조합 파괴,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항공관제사 파업 분쇄를 소환하는데, 두 나라에서는 노동조합 공격에 성공한 후 시장 자유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로 나아가는 데 거침없었다.

역사는 반복하지만 두 번째는 익살극(farce)이다.


이기홍 논설고문/강원대 명예교수·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숫자를 믿는다: 과학과 공공적 삶에서 객관성의 추구』,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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