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리적 포퓰리즘에 맞서는 정체성 서사의 3 요소…공감, 존중, 그물망식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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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리적 포퓰리즘에 맞서는 정체성 서사의 3 요소…공감, 존중, 그물망식 공정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3.06.03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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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포퓰리즘 선언!: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체성 서사 | 로저스 M. 스미스 지음 | 김혜미·김주만 옮김 | 한울엠플러스 | 240쪽

 

민주주의 공동체에서 순수하고 통일된 집합 정체성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가 노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인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을 부지불식간에 조장할 수 있다.

이 책은 정체성 내러티브 경쟁의 틀로 포퓰리즘 시대 미국의 정치를 분석한다. 세계 곳곳에서 병리적 포퓰리즘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열광을 이끌어내며 기승을 부리는 오늘의 현실에 주목하는 이 책은, 이런 현상을 가능케 한 포퓰리즘 서사의 힘과 한계를 명쾌하게 분석함과 동시에 어떻게 하면 그에 맞서는 더욱더 포용적이고 평등 지향적인 정체성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규범적 이상과 현실적 방안을 제시한다.

저자 스미스는 트럼프식의 ‘미국 우선주의’가 드러낸 병리적 포퓰리즘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전통에서 이에 맞설 수 있는 정체성 서사들을 발굴해 재해석한다. 스미스는 훌륭한 국민 정체성 서사에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로 구성원들이 공감resonant할 수 있을 것, 구성원들에게 존중respect을 표할 것, 그리고 그물망식reticulated 공정을 담을 것이라는 3R 원칙을 제시했다. 병리적 포퓰리즘은 스미스가 말하는 더 나은 서사의 세 가지 요건 중 하나인 공감은 충족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머지 두 가지인 존중과 그물망식 공정은 충족하지 못한다. 

정체성 서사가 국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곧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한 조건과 그들이 겪는 난제들, 그들이 품고 있는 여러 불만과 열망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들이 정치를 통해 어떤 부분이 바뀌기를 원하는지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요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체성 서사는 또한 해당 공동체 권력의 통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존중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면서도 모든 시민적 삶이 동질적이 되도록 요구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다원주의를 최대한 수용하여 다양한 집단들의 요구에 가능한 한 최대로 호응하는 차이를 인정하는 그물망식 공정을 추구해야 한다.

스미스는 병리적 형태의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공동체들에서조차 ‘더 나은’ 정체성 서사들, 즉,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존중을 표하며, 그물망식 공정을 담은 서사들이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사실을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밝혀낸다. 특별히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사례인데, 스미스가 주목하는 미국의 ‘더 나은’ 정체성 서사들에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 정치 자체를 민주주의 확대 기획으로 보는 듀이식 서사,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더욱더 완벽한 연방의 통합성을 추구하는 오바마식 ‘여럿이 모인 하나’의 서사, 기본권을 모두에게로 확장하도록 촉구하는 「독립선언서」의 이상을 미국인의 중심 정체성으로 보는 링컨식 서사가 있다.

건강한 국민 정체성의 형성과 공유가 민주주의 회복의 전제 조건임을 역설하는 이 책은 존 스튜어트 밀의 유명한 ‘위해 원칙(harm principle)’을 수정한 다음과 같은 준칙을 제시한다. “공동체와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힘의 행사는 그들 자신을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차별과 경시의 대상이었던 집단들이 개진하는 특별한 대우에 대한 요청뿐 아니라, 경제적 세계화나 환경규제, 기술혁신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공공정책들로 인해 새로운 경제적 불안을 경험하는 집단들이나 전통적인 종교적·문화적 공동체들의 합당한 차등대우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다양한 집단의 소수자들은 자신들이 규정한 형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실질적으로 공정한 기회들을 가질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이와 같은 정체성과 시민적 기풍은 병리적 포퓰리즘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할 뿐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 자유 개념이 포용과 관용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면서 건강한 국민 정체성의 형성과 공유가 민주주의 회복의 전제 조건임을 역설하는 이 책은 양분화된 우리 정치 풍토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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