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개방 1주년, 어떤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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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개방 1주년, 어떤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
  • 서영희 한국공학대학교·한국근대사
  • 승인 2023.06.03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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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개방 1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5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최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역사학, 건축학, 사회학 전공 교수들이 각자의 관점으로 청와대 공간의 역사와 의미를 고찰했고, 필자도 청와대라고 불리기 전 경무대(景武臺) 시절의 역사에 대해 발표했다. 작년 전격적인 청와대 개방 이후 현재까지 300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지만, 초기의 국민적 관심에 비하면 개방 1년을 맞은 최근 방문객 수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개방 초기 천문학적인 숫자의 경제 활성화 효과를 운운하던 문화관광 업계의 추산도 지금은 다소 머쓱해지는 느낌이다. 

왕조시대 구중궁궐 못지않게 성역화되어 있었던 청와대가 “국민 품으로” 돌아온 지 불과 1년 만에 이렇게 국민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역사현장을 방문한다는 기대를 안고 방문한 관람객들을 맞이한 것이 그저 주인 없는 텅 빈 건물들뿐이고, 그 건물들마저도 전통 형식을 취했으나 어쩐지 전통적이지 않고, 미학적으로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으면서 위압적이기만 하다는 인상을 받아서는 아닐까? 관람객들은 청와대 공간에서 벌어진 흥미진진한 근현대사를 듣기 원하는데, 현재는 빈약한 홍보성 설명들만 제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청와대 개방 1년을 맞아 당국은 이 중요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논의하기에 앞서 우선 우리가 청와대 공간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현재의 청와대가 들어선 지역은 원래 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중건 이후 경복궁의 후원에 조성된 경무대였다. 경무대는 창덕궁 춘당대처럼 주로 문·무과 과거시험을 치르던 넓은 뜰을 지칭했다. 고종은 1873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경복궁의 가장 북쪽 지역에 별도로 건청궁을 건립하고 개화정책 추진의 근거지로 삼았다. 당시 건청궁 권역 내 집옥재에는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수만 권의 개화서적이 수장되어 있었고, 1887년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들여온 전등이 불을 밝힌 곳도 건청궁이다. 1888년에는 궁궐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 건립이 시작되는 등 건청궁은 개화정책의 추진본부처럼 활용되었다. 건청궁이나 집옥재에서 외국 공사나 외빈들을 접견하고 국서를 전달받기도 했다.  

이 시기 건청궁의 후원이자 현재 청와대 지역인 경무대에서는 주로 문·무과 전시(殿試)나 특별시가 치러졌는데, 1872년 알성시(謁聖試) 문과에서는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이 선발되었고, 1889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학도들에게 특별시험을 행한 기록도 있다. 고종시대 경무대 지역의 중심 건물은 1868~1869년 사이에 건립된 융문당과 융무당이고, 융무당 앞 너른 뜰에서는 군사훈련이나 군대사열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은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다. 1894년 6월 21일(음력), 일본군이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기습 공격하여 경복궁을 점령한 후 친일 정권을 수립했다. 1895년 8월 20일 새벽에는 광화문 공격 총성을 신호로 경복궁의 서북쪽, 동북쪽 담장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 곤녕합으로 난입하여 왕후를 살해했다. 경복궁의 북쪽 담장에는 북문인 신무문, 그 옆에 계무문, 광무문이 있었고, 현재도 청와대 정문, 연풍문과 마주하고 있다. 을미사변 이후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던 ‘춘생문사건’의 춘생문 역시 경무대 영역으로 들어가는 동쪽 출입문으로서, 현재는 사라져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또한 을미사변 직후 명성황후 유해 관련 사료에는 현재 청와대 관저 뒤에 남아 있는 정자 오운정(원래 이름은 오운각)과 관련된 기록도 있다. 을미사변 당시 왕후의 사체는 건청궁 옆 녹산에서 불태워졌고, 타다 남은 사체 일부는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쪽 봉우리에 임시로 묻었다는 기록이다. 아관파천 직후 경복궁에 있던 왕후의 빈전(殯殿)을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오운각 서쪽 산봉우리 밑에 있는 녹산 숲속으로 가서 땅을 파보니 ‘회사(灰沙)에 촌골(寸骨)이 섞여 있어’ 부위를 잘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양군에 사는 상사(喪事)에 익숙한 한 노인을 불러 옥골(玉骨)을 구분하고 재를 넣어 보충했고, 비단옷 수십 벌로 여러 번 감아서 재궁에 넣었다고 한다. 

현재의 오운정 위치는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면서 옮겨진 것이므로 원래 오운정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고(청와대 경내 ‘천하제일복지’ 바위의 서남쪽) 을미사변 당시의 오운각과 연관지어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오운각의 후신인 오운정의 현판 글씨를 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 당시 공화제를 주장하며 고종과 대립했던 관계인데, 어떤 연유로 현판 글씨를 남겼는지 등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제시하면 관람객들은 근현대로 이어지는 청와대 권역의 역사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정동지역으로 거처를 옮겨 새 궁궐로 경운궁을 건립하고 1897년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주권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대한제국기에도 경복궁과 그 후원 권역에는 여러 전각들이 남아 있었지만, 고종은 참혹한 비극의 현장인 경복궁과 경무대를 다시는 찾지 않았다. 대신 경운궁을 중심으로 새 도로망을 개설함으로써 현재의 서울시청 앞 광장이 한성의 새로운 도심이 되었다. 정동에 위치한 경운궁은 북악을 등 뒤에 두고 깊숙이 자리한 경복궁에 비하면 일반 민간의 주거지 및 상업지역 속으로 궁궐이 들어온 셈이었다.

일제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본격적으로 경복궁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1908년 3월, 경복궁의 일반 공개가 결정되어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궁원(宮苑) 관람표를 사서 구경할 수 있었다. 을미사변의 현장인 건청궁은 1909년 무렵 일제에 의해 헐리고, 병합 직전인 1910년 5월, 공원 건축을 명분으로 4000여 칸의 경복궁 전각들이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경매에 부쳐졌다. 일제가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대대적으로 경복궁 전각들을 훼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남산 기슭에 있던 총독부 청사가 10년 공사 끝에 1926년 경복궁의 정면에 완공된 새 건물로 옮겨 왔고, 경복궁 동북쪽에 위치했던 선원전은 총독부 직원들을 위한 관사로 사용되다가 1929년 관사가 신축되면서 1932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박문사 건립을 위해 경희궁 흥화문, 환구단 석고전과 함께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자선당을 비롯하여 경복궁 내 수많은 전각들이 훼철되어 일본에까지 실려 가거나 일본인들을 위한 사찰, 요정 건물로 팔려나간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훼철된 건청궁 터에는 1935년 병합 25주년 기념 박람회장이 세워졌다가 1939년에는 총독부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2007년, 복원된 건청궁이 일반에 개방되기 전까지 우리는 을미사변의 현장을 찾아볼 수 없었고, ‘건청궁’이라는 이름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경무대 지역에 있었던 융문당, 융무당은 1928년 일본 사찰에 무상으로 대여되어 용산으로 옮겨졌고, 해방 후에는 원불교에서 불하받아 사용하다가 2007년 원불교 성지인 전남 영광에 이건되었다. 고종시대 군대를 사열하던 융무당이 있던 자리에는 총독부 관사가 세워졌고, 과거시험을 치르던 인재 선발 장소였던 융문당 영역은 1929년 9월에 시작된 시정 20주년 기념 조선박람회장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28일에는 광주학생운동 격문이 경성 시내에 돌자 만세 시위에 동참하려는 경신, 보성, 중앙고보생들이 경복궁 후원 경무대에 700여명이나 모여 재동, 계동 일대에 함성이 진동했다는 언론보도도 있다. 이후 한동안 송림 우거진 너른 공터로 남아 있던 경무대에서 경성유치원 원아 원유회, 가정부인협회 대운동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1939년 조선 총독의 관저가 완공된 후에는 다시 금단의 영역이 되었다. 총독 관저가 하필이면 궁궐을 지키던 금위군의 수직소 터에 자리 잡은 것도 예사롭지 않지만, 총독 관저가 경무대에 자리 잡으면서 우리는 고종시대 경복궁 건청궁의 후원으로서 경무대가 담고 있는 역사를 완전히 잊게 되었다. 

일제는 고종시대 개화정책의 산실이었던 건청궁을 훼철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고,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핑계로 수많은 경복궁 전각들을 훼손한 후 경복궁 정면에는 육중한 총독부 청사를, 경복궁의 후원 경무대 지역에는 총독 관저를 건립했다. 조선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경복궁과 경무대 권역의 훼손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의 심성 속 이미지의 전복, 즉 왕조의 몰락을 기정사실화하고 식민지적 근대화를 강변하고자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건청궁에서 시도했던 고종시대의 개화정책이 폄훼되고, 갑오년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과 을미사변의 참혹한 흔적들은 지워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중앙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활용되었던 총독부 청사는 이제 사라졌고, 경복궁 복원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경무대 지역에 세워졌던 총독 관저는 해방 이후 미군정 사령관의 관저를 거쳐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고, 4.19혁명 이후 청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현재의 청와대 본관과 관저 신축 후 1993년 철거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곳에서 있었던 과거의 역사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 터가 남아서 아픈 과거사를 말해주고 있고, 또 그 터에 새롭게 쌓아올린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억을 우리는 국민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조선 총독이 사용하던 경무대 관저를 그대로 사용한 초대 대통령을 비롯하여 역대 대통령들이 청와대라는 대통령 집무공간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왜 민주공화정의 대통령 집무실이 왕조시대의 궁궐 후원에 그토록 오래 동안 자리해왔는지도 한국 현대정치사의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개항 이후 개화정책의 추진과 좌절,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딛고 대한민국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 현장이었던 청와대 지역은 살아있는 근현대 역사교육의 장(場)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개방된 청와대가 단지 미술 전시장이나 문화예술 공연장으로, 혹은 공원이나 관광명소로만 활용되기 보다는 고종시대 경복궁의 후원이었던 경무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서부터 청와대 권역의 역사성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를 넘어 최초로 근대적 주권국가를 선언한 대한제국, 비록 일제 강점기를 거쳤지만 그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의 역사적 흐름을 청와대 권역의 역사성 복원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영희 한국공학대학교·한국근대사

                                                         청와대개방1주년학술세미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전문위원과 경기도 문화재 위원을 역임했고, 역사도시서울 위원과 인천시 문화재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정과 정치세력의 동향에 대해 연구해 왔으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식민통치를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어떠한 유산으로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대한제국정치사연구』,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아! 그렇구나 우리역사 근대편』 외에 다수의 공저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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