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유산, 전두환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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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유산, 전두환의 유산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3.05.27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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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 김영명 교수의 〈생활에세이〉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압제가 계속되자 그에 대한 저항도 심화되었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독재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하다 보니 ‘어라 이거 계속해도 되겠는데? 아니 계속해야 되겠는데?’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3선 개헌과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 독재 체제로 들어갔다. 이에 저항하여 야당 세력들이 뭉치고 이른바 재야 세력들이 시위와 저항을 계속하였는데, 이 저항은 조직과 제도보다는 우두머리 개인들의 지도와 통솔로 이루어졌다. 박정희 체제가 박정희 개인에 의존했던 것처럼 이에 대한 저항도 김영삼, 김대중과 몇몇 재야 인사들의 지배력에 의존했다. 그리하여 큰 틀에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나 각 정치세력들 안에서는 일인 지배의 권위주의가 그대로 남았다. 

박정희가 죽자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영남과 호남의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대권 다툼을 벌였고, 그 결과 지역주의가 매우 심화되었다. 그들의 정치는 나쁘게 말하여 일인 지역 패거리 정치였는데, 역설적으로 이런 비민주적 구조가 민주화 투쟁의 효능을 높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박정희 지배 18년의 정치적 유산이었다. 지역주의와 일인 지배 정치는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 정치의 가장 특징이 되었다. 

양김씨의 경쟁이 머쓱하게 정작 정권은 신군부의 전두환에게 넘어갔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국민들은 즉각 반군부 투쟁에 나섰고, 이를 이른바 운동권 사람들이 주도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 민주화 투쟁은 이전과 달리 매우 급진화, 조직화 되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들이 팽배하였고 심지어 주체사상 신봉 세력들도 설치게 되었다. 전두환이 밀려서 본의 아니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지만, 이번에도 양김씨의 경쟁 속에서 신군부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운동권 세력은 ‘아니다, 이건 인정할 수 없다, 아직 민주화가 안 되었다’ 하면서 투쟁을 계속하였고, 때때로 폭력 사태도 불사하였다. 

박정희가 양김씨의 일인 지배를 낳았다면 전두환은 강경 운동권 세력을 낳았다. 노태우 뒤에 드디어 양김씨가 차례로 대통령이 되어 이제 강경 민주화 투쟁은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지역주의와 권력 안 권위주의는 지속되었다. 이를 타도하겠다고 나선 인물이 노무현이었다. 시도는 좋았다. 문제 제기 자체는 시대의 흐름에 필요한 것이었지만, 기성 질서의 강고함과 신중하지 못한 개인적인 결함이 어우러져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불명예스러운 뇌물 혐의로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당장은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극한 대립하는 불씨가 되었다. 그 여파가 지금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진보 진영을 대변한다는 이른바 586 세력은 전두환 시절의 운동권 인사들이다. 노무현 시절 386의 참신한 신세대로 정치권의 기대를 모았고, 이후 10년간의 보수 정권 시절 힘을 잃었다가 문재인 당선 뒤 권력의 중추로 나타났다. 양김씨가 박정희의 유산이었듯이 이들은 전두환 독재의 유산이다. 

정권 타도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해도 된다는 의식·무의식이 내면화되다 보니 이들은 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잘못인 줄도 모르는 것 같다. 최근의 사태들을 나열하는 것은 오히려 식상하다. 그러나 양김씨의 지역 기반 일인 지배 패거리주의가 사라졌듯이 이들의 ‘내로남불’ 막무가내 정치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이들의 나이가 그렇게 되었다.   

그 뒤에 또 누구의 유산으로 어떤 정치가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현상들이 한국 민주주의가 자라나는 성장통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적어도 비관론자는 아니니까 말이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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