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의 미학, 『중용(中庸)』의 감정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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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의 미학, 『중용(中庸)』의 감정과학
  • 성동권 국민대학교·유교철학
  • 승인 2023.05.1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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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테제_ 『유교문화의 미학 중용의 감정과학』 (성동권 지음, BOOKK, 330쪽, 2023.03)

 

 

1. 감정과학에 관하여

‘감정과학’(Science of Feelings)은 무한한 방식으로 무한하게 새로운 감정에 나아가 그에 고유한 본성의 필연성을 인식함으로써 감정의 ‘순수지선’(純粹至善)을 인식하는 학문론입니다. 감정의 감각적 현상에 의존함으로써 감정의 ‘선악’(善惡)을 해석하는 ‘현상해석학’이 아닙니다. 감정이 자기 존재에 관하여 ‘우연성’이 아닌 ‘영원의 필연성’을 본성으로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 한에서, 오직 감정과학만이 감정에 대한 참다운 인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필연성으로 존재하는 것을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방법의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정의 본성을 명백하게 이해함으로써 감정의 순수지선을 믿고, 이 믿음 안에서 감정의 무한한 새로움을 본성의 순수지선으로 배우는 학문이 감정과학입니다. 

‘감정과학’은 동서양의 공통된 학문론입니다. 이 학문은 16세기 동양의 조선 시대 성리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17세기 서양의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 1632~1677)의 『윤리학(Ethica)』에 기초합니다. 이 두 학자는 인간의 진실을 ‘몸’에 둡니다. 우리는 몸으로 태어나서 몸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진실은 자명한 것입니다. 이 자명한 진실에 기초하여 퇴계와 스피노자는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떠나서 몸으로 살아가는 지금 우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은 필연적입니다. 감정에 대한 타당한 인식이 지금 우리 자신에 대한 타당한 인식입니다.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기분 어때?’라는 질문에 지금 ‘나’의 몸이 느끼는 감정이 ‘나’의 존재입니다. 이 자명한 사실에 기초하여 퇴계와 스피노자는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우리의 몸이 영원의 필연성으로 생겨났다면 몸으로 느끼는 우리의 감정 또한 영원의 필연성을 본성으로 가질 것이므로, 감정에 대한 타당한 인식은 무한히 새로운 감정의 감각적 현상이 자기 안에 본래부터 품고 있는 본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질문해야 합니다. ‘몸이 영원의 필연성으로 생겨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국민대학교 문화교차연구소’의 『유교문화 감정과학연구총서』는 이 문제의 해답을 유교문화의 『사서(四書)』에서 찾습니다.


2. 감정과학에 기초한 유교문화

유교문화의 『사서(四書)』는 『논어(論語)』, 『대학(大學)』, 『중용(中庸)』, 그리고 『맹자(孟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논어』와 『대학』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논어』는 ‘학이시습’(學而時習)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時)는 칸트의 ‘선험종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학(學)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己) 몸(身)에 대한 타당한 인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시간’은 몸으로 태어난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며 매순간 새롭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이해로부터 ‘시습’(時習)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공자는 ‘종심소욕’(從心所欲)으로 확인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정말 감정대로 살아도 되는 거야?

공자가 ‘시습’(時習) 앞에 ‘학’(學)을 두었다는 사실이 이 물음을 해결하는 단서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알았다는 것으로 끝나므로 공자가 배움(學)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지 밝혀야 합니다. 이 문제의 답이 지천명(知天命)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학』의 핵심이 ‘수신’(修身)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여기에 근거하면 배움의 기초는 지금 우리 자신의 몸(身)에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며, 배움의 결과는 지천명(知天命)이기 때문에 수신의 수(修)는 당연히 몸의 천명(天命)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은 필연적입니다. 우리 자신이 자기의 몸에서 천명(天命)을 인식하는 한에서 몸은 천명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몸이 느끼는 감정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은 실질적으로 ‘천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유교문화의 미학 중용의 감정과학> 서문 中

마지막 질문은 ‘천명’(天命)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답은 공자를 향한 우리의 ‘상상력’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필연성 안에서 자명한 이해를 형성하는 우리 자신의 ‘정신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몸이 아닌 지금 ‘나’의 몸에 고유한 본성으로서 ‘천명’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의 정신 안에서 명백한 진실입니다. 여기에는 우연성이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필연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몸은 ‘엄마아빠의 몸’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에도 우연성은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필연성입니다. ‘엄마아빠’의 엄마아빠는? 이렇게 인과의 필연성에 입각하여 생각을 무한히 전개하면 지금 나의 몸은 영원의 필연성으로 존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이것이 ‘천명’(天命)입니다.

몸이 영원의 필연성으로 생겨났다는 사실로부터 몸으로 살아가는 ‘감정’도 당연히 영원의 필연성 안에 존재합니다. 이 진실이 감정에 대해서 믿고 배울 수 있는 감정과학의 기초입니다. 우리 자신의 감정을 비롯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은 무한한 새로움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무한한 감정들은 영원의 필연성 안에 존재합니다. 이 사실이 분명하므로 무한히 새로운 감정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감정에 고유한 영원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데에 있습니다. 매순간 새로운 감정에 나아가 그에 고유한 필연성을 배우면, 그 즉시 감정의 ‘순수지선’을 이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감정의 천명(天命)을 배워서 감정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완전성이며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배움이 유교문화를 정초한 공자의 감정과학입니다. 


3. 유교문화의 미학, 『중용(中庸)』의 감정과학

공자의 감정과학을 증명하는 문서가 『중용(中庸)』입니다. 수신(修身)은 천명(天命)을 이해하는 지천명(知天命)이며, 이것이 곧 지금 ‘나’의 몸에 고유한 본성(性)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중용』은 이 이해를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 요약합니다. 몸에 고유한 본성이 천명이기 때문에 이 진실 그대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입니다. 우리가 영원의 필연성 안에서 몸의 본성으로부터 감정의 본성을 이해하는 한에서 감정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감정의 현상에 의존하는 해석이 아니라 감정에 고유한 본성에 근거하여 감정의 무한한 새로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 감정과학입니다. 이 학문을 『중용』은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고 정의합니다. 배움은 감정에 대한 참다운 인식입니다.

영원의 필연성인 천명(天命)의 성(性)이 지금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감정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용』은 ‘미발지중’(未發之中)이라 합니다. 감정은 어떤 외부 원인에 의해서 우연히 존재하도록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 고유한 본성으로서 ‘영원의 필연성’(天命)에 의해서 영원성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감정 자체의 본성으로서 ‘미발지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방식으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감정은 영원으로부터 영원에 이르는 영원의 필연성으로 존재하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의 감정입니다. 이 사실을 『중용』은 ‘중절지정’(中節之情)이라 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은 필연적입니다. 감정의 현상이나 어떤 행동으로 감정을 해석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감정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닙니다. 

몸과 감정을 영원의 필연성으로 믿고 배움으로써 몸과 감정의 순수지선을 이해하는 것이 유교문화의 ‘감정과학’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필연성으로 『중용』은 감정과학을 ‘자연과학’(Natural Science)으로 전개합니다. 자연을 구성하는 천지만물이 자기의 ‘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은 ‘감정’으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합니다. 감정과학이 자연을 이해하는 기초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중용』은 ‘중화’(中和)라고 확인합니다. 따라서 자연의 몸과 감정이 영원의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그 즉시 우리는 최고의 완전성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됩니다. 따라서 감정과학으로서 『중용』의 자연과학은 ‘다 좋은 세상’, ‘다 좋은 감정’을 배우는 최고의 ‘미학’(aesthetics)입니다. 이 학문이 유교문화의 ‘인’(仁)입니다. 


4. ‘다 좋은 세상’, ‘다 좋은 감정’을 향한 믿음의 학문

감정과학은 영원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으로 우주의 모든 몸과 그 모든 몸이 느끼는 감정을 명석판명하게 이해합니다. 그 결과 무한한 방식으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의 순수지선(純粹至善)을 영원의 필연성 안에서 무한한 방식으로 무한하게 확인합니다. 이것으로 학문은 무한히 발전하게 되며, 이 발전은 문명의 행복과 번영을 무한히 증진시켜갑니다. 21세기 초거대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 자신의 행복과 자신이 속한 문명의 번영을 위해 반드시 연마해야 하는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과학입니다. 왜냐하면 이 학문은 정보의 종합이 아닌 그에 앞서는 정보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분석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종합의 학문이지만, 감정과학은 분석의 학문입니다. 분석이 분명할 때 인공지능도 순수지선으로 제 역할을 합니다. 


성동권 국민대학교·유교철학

•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교차학협동과정 교수.
• 국민대학교 문화교차연구소 소장.
• 성균관대학교 유교철학 박사
• 대표 저서: 『유교문화의 정초 공자의 감정과학』, 『유교문화의 학문 대학의 감정과학』, 『유교문화의 미학 중용의 감정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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