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없는 출산, 고통 없는 죽음이 불러올 미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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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없는 출산, 고통 없는 죽음이 불러올 미래 세상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4.30 2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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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로봇과 자살기계: 인간의 삶과 죽음까지 뒤흔드는 미래 기술의 충격 | 제니 클리먼 지음 | 고호관 옮김 | 반니 | 424쪽

 

이 책은 크게 섹스로봇과 배양육, 인공자궁과 자살기계를 다룬다. 섹스와 고기, 탄생과 죽음은 우리의 기본적인 요소다. 지금까지 인간의 삶이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죽은 동물의 살을 먹고, 다른 인간과 성관계를 맺어왔다. 이 모든 본능을 대체하려는 생명과학기술은 그 어떤 기술보다 인간의 삶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 가능성이 크다. 생생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미래기술이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형태와 윤리를 요구하고 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인간 한계를 뛰어넘을 해결책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들을 진정으로 이끄는 동력은 무엇일까? 왜 자살기계를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치며, 인공지능을 탑재한 섹스로봇을 사려고 줄을 선 사람들은 또 누굴까? 기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어떻게 막으려고 하는 걸까? 이 발명품이 불러올 불가피한 결과는 뭘까? 이 책은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뒤흔드는 미래기술의 충격이 지금 다가오고 있다.

온라인 포르노가 인터넷의 성장을 이끌었듯 섹스를 위한 휴머노이드의 개발은 이미 로봇공학의 발전을 가속하고 있다. 컴퓨터 과학자 데이비드 레비 교수는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를 볼 때 2050년이면 인간과 로봇의 결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것으로 예측한다. 저자는 미래에 섹스로봇이 완벽한 반려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섹스로봇에 익숙해져 공감능력이 사라진 인간을 양산할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필라데피아의 한 연구실, 양의 태아가 투명한 비닐팩 안에 든 액체에 잠겨 탯줄이 밝은 색 피로 가득 찬 관다발에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비닐팩과 관이 자궁을 대체하기만 하면, 임신과 탄생의 정의는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분유가 남성도 똑같이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있게 만들었던 것처럼 체외 발생은 임신과 출산이 더 이상 여성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성의 의미 역시 바뀔 것이다.

생명 탄생의 영역에 아직 미지의 부분이 남았다면 죽음은 윤리적인 문제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죽을 권리를 의사와 정신의학자에게 맡길 것인가?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는 걸까? 저자는 자발적 안락사 단체 엑시트 인터내셔널의 설립자인 필립 박사를 인터뷰한다.

필립 박사는 자살기계 사르코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자신이 최후를 맞이하는 방식을 결정하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볼 때 그 과정이 갈수록 의료화되는 게 걱정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통제권을 잃고 있어요. 통제권을 다른 무리, 대개 의료 전문가의 권위에 빼앗기는 거죠. 사르코는 이렇게 말하게 해줍니다. ‘결정은 내가 했다. 다른 어떤 전문가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이 기계는 안에 들어가 녹색의 ‘죽음’ 버튼을 누르면 질소 기체가 나오게 만들고, 빨간색 ‘정지’ 버튼은 마음이 바뀌었을 때 누를 수 있게 되어있다. 게다가 3D프린터로 뽑은 몸체는 매우 세련되었다. 저자는 이 기계가 죽음을 매력적이고 도취적으로 그리고 유혹적으로 보이게 했다고 지적한다. “누구든 처음으로 사르코에 들어가 버튼을 누른다면 그건 이벤트가 될 것이다.” 죽음이 금기로 남아 있고 도움을 받아 죽는 일이 선택받는 몇 명에게만 열려 있는 선택지인 한 DIY 죽음이라는 시장은 언제까지나 존재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기술이 섹스와 음식, 탄생과 죽음을 말 그대로 재정의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완벽한 반려자, 완벽한 탄생, 완벽한 고기, 완벽한 죽음을 가져다줄 발명품은 욕구의 흐름과 시장의 압력에 따라 스마트폰처럼 일상에 스며들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급격히 뒤흔들어놓는 기술은 항상 예측 불가능한 여파를 동반하는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예지자라도 이런 혁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는 알 수 없다. 임신하지 않고 아기를 가질 수 있다면, 동물을 죽이지 않고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인간적 공감 없이 이상적인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인간의 본성은 어떻게 변할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벽’보다 불완전함, 타협, 희생, 의심과 어울려 살아간다. 아무리 ‘지구를 구하자! 조그만 아기를 구하자! 외로운 사람들에게 반려자를 제공하자! 아픈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자!’라는 고귀한 의도를 가지고 개발했다고 해도 우리는 이런 발명품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모른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처칠이 1931년에 쓴 에세이 〈50년 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유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지난 세대가 꿈도 꾸지 못했던 계획이 우리의 직계 자손을 집어삼킬 것이다. 무시무시하고 파괴적인 힘이 그들의 손안에 들어갈 것이다. 안락함, 활기, 쾌적함, 즐거움이 그들에게 밀어닥치겠지만,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통찰력이 없다면 그들의 가슴은 아프고, 삶은 황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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