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과거극복: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설립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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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과거극복: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설립과 활동
  • 박재영 대구대학교·서양사
  • 승인 2023.04.3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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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며 인간 집단의 경험과 기억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민족이나 국가는 집단 기억의 공동체로서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한 가해와 피해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거 인접국들에게 행한 군사적 침략과 정치적 지배, 인종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등은 윤리적 책임의식이 동반된 집단적 부채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어떠한 형태로든 개인적·집단적 책임의 청산이라는 풀기 어려운 과제를 남겨 놓는다. 공동체간의 집단적 부채는 반성과 배상, 사죄와 용서의 의식을 통해 청산내지 극복될 수 있지만,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양상은 일반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양하다. 그러한 다양함 속에서도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대응과 극복의지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독일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과 제3제국의 종언, 1990년 독일의 재통일,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과거 나치가 저지른 전쟁범죄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해오고 있다. 이러한 과거극복을 위한 노력은 사법적 청산(뉘른베르크재판), 정치적 청산(브란트, 바이체커, 라우 등 정치가들의 과거사 반성 발언), 물질적 보상(유대인학살, 강제노동), 독일 게오르그-에케르트 연구소가 중심이 된 역사교과서 개선활동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세계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하나의 성공적인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 “기억·책임·미래(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 재단”의 설립과 활동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제3제국에 의해 점령된 대부분의 유럽지역에서는 비인간적인 조건하에서 독일의 전쟁수행을 위해 수백만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독일은 애초에 사법적 방법을 통한 민간인 피해배상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재단의 설립은 외국인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국제연대를 통해 끈질기게 배상을 요구한 끝에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리고 1998년 연정을 구성하여 집권한 독일 사민당(SPD)과 녹색당(Grüne)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독일의 의회와 기업들을 설득한 것도 주요했다. 지난 2000년 8월 2일 법령(Stiftungsgesetz)에 의거하여 독일 정부와 기업이 2차 대전시 동원된 강제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을 위해 공동으로 100억 마르크(독일정부: 50억 마르크/독일기업: 50억 마르크)라는 기금을 마련하여 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동 재단의 설립은  2차 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어 희생을 강요당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국제적인 협의와 보상을 전제로 출발하였다. 미국과 독일 양국 정부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독일 제3제국에 점령되었던 국가들, 특히 희생자 연합과 희생자를 위한 변호사 협회의 참여로 전 세계적인 규모로 국가 간, 지역 간의 협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협의의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과 미국사이에서는 공동성명과 유사한 협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국제적인 협의의 결과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확립될 수 있었으며, 이는 결국 독일 정부에 의한 ‘재단법’으로의 통로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지난 2000년 8월에 법안이 통과되어 설립된 동 재단의 주요 과제는 첫째, 범세계적 보상프로그램(Auszahlungsprogramme)의 범위에서 과거 나치독일에 의해 불법적인 대우를 받은 희생자들에 대한 재정적인 보상, 둘째, 열악한 환경 하에서 강제노동에 의해 착취 받은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 셋째, 의학적 실험 대상이었거나 또는 자녀들을 어린이수용소(Heim)로 보내야 했던 강제노동자들에 대한 개인적 피해보상, 넷째, 독일연방 피해보상법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 신청할 수 있는 재산상의 피해보상, 다섯째, 재단 재정을 모두 지불한 다음까지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특별한 지속적인 기관으로서 “기억과 미래 기금”의 설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 기금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7억 마르크라는 재정으로 나치독일의 불법행위에 의한 희생자들을 기리며 후대의 관심을 촉구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나치 시대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금 협정이 독일 정부 및 기업과 피해자 변호인 측 간의 장기간 협상 끝에 지난 1999년 12월 체결되었다. 그리고 2000년 7월 관련 7개국이 국제보상협정에 서명함에 따라 보상을 위한 법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2000년 7월 4일 독일 연방의회의 “기억·책임·미래 재단” 설립 <결의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의 서두에서 독일의회는 동 재단의 설립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서 그 동안 방기해오던 역사에 대한 책임, 곧 독일 현대사의 가장 치욕스러운 한 부분인 강제 노동자에 대한 불법행위, 징용, 학대 그리고 착취를 반성하면서, 이 법으로 인해 뒤늦게나마 희생자들에게 인간적이고 경제적인 의무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됨을 언명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독일의회는 독일인이 외국인 강제 노동자들에게 가한 행위에 대해 독일 국민을 대표해서 그들의 용서를 구하고 있다. 아울러 희생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을 위한 재원은 독일의회와 독일연방정부가 이 재단에 출연한  50억 마르크와, 특히 강제 노동자를 고용했던 독일의 기업이나 그 기업의 법적 상속자들이 나머지 50억 마르크의 기부금 모금에 동참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회는 이 보상금이 아직 생존하고 있는 희생자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분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결의문>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부분은 희생자들이 그들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들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회는 나치시대 강제 노동자들을 고용한 적이 있는 기업들이나 그 기업의 법적 상속자들은 그 해당 기업의 문서고를 개방하여 희생자들의 보상청구권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독일의회는 독일 연방정부가 조직적·재정적, 혹은 인적인 조치를 추가로 강구하여 각 희생자들과 협력단체가 보상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조력해 줄 것과, 각 지방 정부 및 지방 자치단체들이 그 산하의 문서고를 개방하고, 질의응답 시스템을 향상시켜 희생자 및 협력단체가 보상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점이다.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핵심과제는 나치독일에 의해 불법적으로 피해를 입은 강제노동자와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의 해결이었다. 재단의 설립 이후 2007년 현재까지 동 재단의 공동발기인인 독일 정부와 기업들은 국제적 협력단체들의 조력에 힘입어 100여 개국에 걸쳐 약 1,660,000명의 강제노동 희생자들에게 44억 유로에 달하는 피해보상을 하였다. 2007년 6월 11일 베를린에서 있었던 21번째 재단 사무국 회의에서 나치시대의 강제노동자들과 나치에 의한 희생자에 대한 공식적인 보상의 종결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독일연방공화국 총리 메르켈(Angela Merkel)의 배석하에 연방대통령 쾰러(Horst Köhler)는 위와 같은 강제노동자에 대한 “기억·책임·미래 재단”의 구체적 피해보상 내역을 공포하였다. 

그와 더불어 동 재단은 2008년까지 지속적으로 협력단체들과 연계하여 휴머니즘에 입각한 프로그램들을 추진해 나갔다. 과거 나치독일에 의해 강요되었던 강제노동의 부당성에 대한 인식은 보상의 이행과정에서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으며, 피해보상에 대한 신청과정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동 재단은 “나치독일에 의한 강제노동(NS-Zwangsarbeit)"을 역사적인 규명이 필요한 주요 과제로 삼을 것이라는 점을 재단 홈페이지에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공동협력을 장려하는 국제적인 프로젝트들을 지원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천명하고 있다.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청구 문제의 해결은 단순하게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휴머니즘적 문제라는 독일 내 여론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거기에는 역시 희생자들의 지속적이며 조직적인 법정투쟁과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의 축적과 같은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와 더불어 비록 독일 정부와 기업들이 과거 나치시대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배상의무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인도적 차원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진 사실은 지난 일제 식민지시대의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개인적 배상청구권을 문제시하는 일본 정부와 법원의 태도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일본 정부는 국가 간 포괄적 배상이라는 원칙하에 이미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한국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했으므로 더 이상의 배상책임은 없다는 태도를 취해 왔다. 그러나 독일 경제인협회와 독일 연방의회는 나치독일에 의한 희생자들과 노예처럼 강제노동을 강요당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추방이나 체포, 구금, 착취, 강제노동 및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에까지 내몰린 인권유린의 피해자들이었다.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의 전 이사회 의장이었던 미하엘 얀센(Michael Jansen) 박사가 재단 사무국 결산보고에서 했던 언급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동원에 대하여 배상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일본 정부 및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어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권리가 있다는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바 ‘제3자 변제’ 방안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윤석열 정권에 시사하는 바가 많기에 여기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회고해보건대 재단사업의 시작단계에서부터 조직구성의 어려움과 이와 함께 동반된 공식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대립 등에 관한 기억들은 희미해져 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에게 후원 사업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기억되어지는 중유럽과 동유럽에서의 나치독일에 의한 경악스러운 범죄행위입니다. (…) 지난 몇 년에 걸친 재단과 7개의 국제적인 협력단체들과의 공동협력은 몇 배로 그 효과가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는 재단 사업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또한 많은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특히, 나치시대 강제노동 생존자들과의 만남은 종종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는 협력단체들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과의 진한 우정으로 맺어진 공동 작업을 통한 동료애에 감사를 드립니다. (…) 1,660,000명이 넘는 이전의 강제노동자들에 대한 이러한 늦은 보상이 희생자들이 개인적으로 받았던 고통스러웠던 운명에 대한 어떠한 ‘회복’도 되지 않겠지만 이러한 물질적인 도움이나마 몇몇 경우에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 재단법이 우리에게 제시한 과제를 우리는 협력단체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이루어 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프로젝트의 정치적인 성공에 대하여 감히 언급한다면 우리는 단지 이러한 프로젝트를 행했다는 사실 뿐입니다.”


박재영 대구대학교·서양사

대구대학교 자유전공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역사와교육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독일 Carl von Ossietzky Universität Oldenburg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  『세계의 역사교과서 협의』(공저), 『타자 인식과 상호 소통의 역사』(공저), 『역사교육과 국가이미지(공저)』(2019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역사와 고정관념』(2022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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