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잠’과 코로나
상태바
‘과잠’과 코로나
  •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 승인 2023.04.17 0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원형 칼럼]

대학 캠퍼스 주변에서 이른바 ‘과잠’을 입은 학생들을 볼 수 있게 된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필자가 대학에 다녔던 1990년대 후반에는 대학 마크를 큼지막하게 붙인 가방이 유행했었는데, 그 유행이 어느 순간 사라진 듯하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학교나 학과 이름을 수놓은 점퍼, 즉 과잠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가방처럼 한때의 유행으로 잊혀질 줄 알았던 과잠은 어느덧 한국 대학가의 새로운 전통이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물론 과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학교나 학과의 상징을 그려 넣거나 수놓은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 필자는 고등학생 때도 같은 반 친구들끼리 같은 티셔츠를 만들어서 소풍 때나 체육대회 때 입었고, 대학생 때 학과와 동아리에서 만든 단체복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입고 다닐 정도다.

하지만 지금의 ‘과잠’은 갖가지 색상과 모양으로 제작하던 종전의 티셔츠 등과 달리 디자인이 어느 정도 규격화된 야구 점퍼에 학교나 학과의 이름과 상징물 등을 수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획일적인 것은 또 아니어서, 자세히 살펴보면 학생들이 저마다 개성 넘치는 문구나 그림 등을 과잠 도안에 반영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기 학과의 상징물이 재치 있게 들어가게끔 교표를 변형한다든지, 멋글씨(캘리그래피) 솜씨를 활용해 학교를 상징하는 동물 모양으로 학교 이름을 써 넣는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한때는 선후배들끼리, 또는 동기들끼리 학번을 구별하려는 의도였는지 학번을 가리키는 숫자를 옷에 수놓는 학생들도 많이 보였는데 요즘은 적어도 필자가 느끼기에는 그런 모습이 예전보다 눈에 덜 띄는 것 같다. 과잠 또한 모두 엇비슷해 보여도 알고 보면 그 나름대로 개성이 드러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유행도 타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대부분 교복을 입었을 학생들이 사복을 마음껏 입을 수 있는 대학에 와서까지 다른 사람들과 마치 교복처럼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식 집단주의니 뭐니 하면서 문제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꼭 그렇게만 볼 필요가 있을까 싶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소속감과 유대감을 가지려는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고, 학교 공동체에서 그런 소속감과 유대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느낌을 이렇게 과잠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혹자는 과잠이 학교 서열 의식을 은연중에 조장한다면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예컨대 소위 명문대생들은 학교 이름을 과잠에 큼지막하게 써 붙이고 다니는 반면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학교 학생들은 학교 이름보다 학과 이름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리가 없지는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어떤 학교 학생들이든, 돋보이게 드러내는 것이 학교 이름이든 학과 이름이든,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과 소속감을 표현하겠다는 것을 굳이 막을 이유는 없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어떤 학교를 다니든, 어떤 학과 학생이든 자신이 속한 학교와 학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과잠으로 당당하게 표현하는 학생들이 늘어난다면 학교 서열 의식도 충분히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다양한 과잠들을 보면서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코로나 사태를 겪는 동안에도 과잠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활성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학교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필자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학교에서는 거리두기가 사실상 해제된 올해 들어 과잠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전보다 늘어난 듯하다. 단순히 등교하는 학생 수가 늘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과잠을 입는 학생의 수가 늘어난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과잠이 눈에 많이 띄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분히 획일적이었던 과잠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학과별 개성을 드러내 놓는 사례도 최근 들어 부쩍 많아졌다. 예컨대 생명과학 전공생들은 서울대학교 교표의 펜과 횃불 자리에 DNA 이중나선 구조 그림을 그려 넣은 과잠을 입고 다닌다. 학생들은 여러 해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학교에 대한 소속감을 잃지 않으면서 개성 있는 과잠으로 그 소속감을 만끽해 온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대학생이라는 것을, 그중에서도 어떤 학교 학생인지를 상기하기 위해 과잠을 더 절실히 찾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과잠 유행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 어떤 식으로든 우리 학생들이 자기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지니면서 자기만의 개성 또한 마음껏 발휘했으면 좋겠다. 이제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으니 과잠도 하나둘 옷장 안으로 들어가겠지만,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 다시 과잠이 등장할 때면 학생들이 또 어떤 번뜩이는 재치를 과잠에 담아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학생들의 이 연대감과 개성, 그리고 재치는 제 아무리 감염병 유행이 다시금 닥친다 하더라도 부디 사라지거나 퇴색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조원형 편집기획위원/서울대·언어학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만하임 라이프니츠 독일어연구원 방문학자,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등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천주가사에 대한 텍스트언어학적 연구”, “텍스트언어학에 기반한 ‘쉬운 언어(Leichte Sprache)’ 텍스트 구성 시안”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