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새겨둔 옛사람들의 고백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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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둔 옛사람들의 고백과 기억
  •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23.04.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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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_ 『반구대 이야기: 새김에서 기억으로』 (전호태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SKKUP), 352쪽, 2023.02)

 

이 책은 35년 가까이 이어져 온 반구대 암각화와의 인연을 정리한 글로 이루어져 있다.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로 사회생활의 첫 걸음을 내딛기 전, 백과사전에 실릴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에 대한 설명 글을 교열한 게 반구대암각화와의 첫 만남이다. 1993년 울산대학교 사학과로 직장을 옮긴 후, 처음 한 일도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 준비였다.

발견된 다음 해 국보로 지정된 천전리 각석과 달리 반구대암각화는 언론과 일반의 관심을 잠깐 받다가 바로 잊혔다. 한 해 상당한 기간, 사연댐에 막힌 대곡천 물이 암각화를 반쯤 가리고 있어 제대로 된 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암각화라는 선사미술의 한 분야를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도 국내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20년이나 흐른 뒤인 1993년 울산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주관하는 울산의 암각화 재조명 학술대회가 열리고, 1995년 역사민속학회 주관 한국 암각화 심포지엄이 개최되면서 반구대암각화도 다시 국내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필자의 주된 전공분야는 고구려 고분벽화다. 하지만, 울산대를 새 직장으로 삼으면서 지역의 주요 문화유산인 암각화 연구에도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관련한 중국 화상석과 고분벽화 연구에 이어 한국의 암각화가 세 번째 연구 주제가 된 셈인데, 지난 30년간 쓴 암각화 관련 글은 대부분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에 관한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국내외를 통틀어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에 대한 연구서 및 교양서를 낸 연구자도 필자가 유일하다.

반구대암각화는 적어도 네 차례에 걸쳐 생계 방식이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해 새겨졌다. 물론 눈여겨 찬찬히 살펴보면 각각의 새김 집단이 암각을 남기는 작업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암각문이 여러 차례 겹쳐 새겨진 데에 더해 암각 작업이 그친 이후에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적인 풍화가 이루어져 각각의 생계 집단 안에서 여러 차례 나뉘어 암각화가 새겨지는 과정을 일일이 읽어내 복원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세 번째로 반구대를 찾은 고래 새김 집단이 적어도 세 차례 나누어 암각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그나마 의미 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이 독특한 생김의 바위, 신앙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성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바위를 찾아온 사람들은 바위 여러 곳에 띄엄띄엄 조심스럽게 짐승들을 새겼다. 사냥이 주업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사람들에 의해 특별한 기법이라고 보기 힘든 단순한 쪼기 중심의 암각 작업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하지만, 새긴 짐승들 사이에 어떤 스토리가 있음을 읽어낼 정도로 구도가 잡혀 있지는 않다. 새겨진 각각의 짐승들에 부여된 의미는 있었을지라도 지금으로서는 이를 짚어낼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잡히지 않는다. 발견으로 이름 붙인 첫 번째 새김의 장에서는 바위 새김이 처음 이루어지던 신석기시대의 환경, 바위신앙, 반구대암각화가 물에 잠기는 원인이 된 사연댐 문제 등을 독립된 꼭지로 함께 다루었다. 

두 번째로 이 바위를 찾아와 암각을 남긴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예술 감각과 기법을 보여준다. 넓고 편편한 바위는 선사시대 특유의 캔버스가 되었고, 끝이 뾰족한 돌을 손에 들고 바위 앞에 선 사람들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정도로 짐승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확인되는 그림을 바위 여러 곳에 남겼다. 이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여러 차례 이 바위를 찾아와 서사적인 구도를 보이는 장면들로 바위의 빈 면을 채워나갔다. 이들이 사슴을 비롯한 초식 동물 위주 사냥을 했고, 새로운 도구인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는 사실도 암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이루어진 암각은 첫 번째와 달리 윤곽 안의 것을 모두 쪼아 파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면 쪼기로 불리는 이런 식의 새김은 암각 대상의 형상을 잘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런 새김 기법은 대상이 지닌 세부적 특징, 예를 들면 줄무늬나 점무늬가 있는지 등의 사실은 알아낼 수 없게 한다. 두 번째 암각 단계에서는 고래도 몇 등장하는데, 아마도 스트랜딩이라는 방식으로 울산만 안쪽 해변에 올라와 죽은 거대한 바다짐승 고래를 몇 차례 먹거리로 삼은 경험이 바위에 고래를 새기게 만든 듯하다. 두 번째 새김을 다룬 장에서는 반구대암각화 바위 둘레의 풍경, 새김을 시도한 사람들의 주술적 의도와 샤먼의 존재, 바위 새김을 하던 사람들이 살던 마을에서의 교역과 축제 등을 함께 살펴보았다.

반구대 바위에서의 세 번째 암각 주제는 고래다. 반구대암각화를 세계 선사미술 연구자들이 신석기 미술의 가장 주요한 작품으로 기억하게 만든 암각 고래. 이 고래는 반구대 바위 앞에 선 세 번째 암각 집단이 이전까지와는 달리 바다로 나가 고래를 사냥하며 살던 사람들임을 증언하는 존재다. 고래라니! 3~4톤에 불과한 코끼리보다 열 배, 스무 배나 크고 무거운 고래를 사냥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반구대 바위를 찾아와 그들의 삶과 소망, 기도와 주술을 암각화로 남긴 것이다.

반구대 바위에 새겨진 고래는 모두 57마리이다. 이 가운데 종이 밝혀진 것은 여섯으로 혹등고래, 북방긴수염고래, 귀신고래, 들쇠고래, 참돌고래, 범고래 등이다. 한반도 바다에서 발견되는 고래는 35종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밍크고래처럼 바다 위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그리 크지도 않은 고래는 반구대 바위에 암각문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바위에 암각문으로 새겨졌어도 종류를 알 수 없는 사례도 적지 않다.

정말 고래를 사냥했는지 여전히 의문시하는 이들이 있고, 청동기시대 정도는 되어야 금속제 도구로 고래를 사냥할 수 있었을 거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반구대 바위에 작살에 찔린 고래가 새겨졌을 뿐 아니라, 카누형의 고래잡이배도 여러 척 그림으로 새겨진 데서 실제 고래 사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울산 앞바다를 비롯하여 부산 동래 패총, 남해안 여러 곳의 패총에서 다수의 고래 뼈가 수습되고, 뼈로 작살 끝이 부러진 채 고래 척추에 박힌 사례도 있어 신석기시대 고래 사냥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밝혀졌다. 고래 새김이 주제였던 세 번째 장에서는 고래의 종류별 특징, 고래 사냥 뒤의 고래 해체와 분배, 해양 수렵민의 삶에 고래와 함께 등장했던 상어, 거북, 가마우지, 바다사자 등도 꼭지별로 나누어 언급했다.

반구대 바위 네 번째 암각 주제는 맹수다. 깊게 갈아 새기는 방식으로 형상화된 맹수들은 몸의 무늬도 잘 표현되어 종류와 특징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짐승들을 새긴 사람들은 이전과는 생계 방식이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전형적인 사냥채집사회에서도 맹수는 외경의 대상이었지만, 농경사회에서는 외경스러운 존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제사되었다. 사냥과 농경, 채집을 겸하던 사람들에게 호랑이나 표범은 매우 두려운 존재였고 사냥할 짐승이기보다는 기도와 신앙의 대상으로 더 중요시 되었다.

56꼭지를 4부로 나눈 이 책의 글들은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도 하나, 하나 독립되어 있다. 또 각 꼭지의 글이 지닌 의미와 무게도 가볍지 않다. 읽기 쉽게 글을 풀어내면서도 길지 않게 썼고, 각 꼭지의 글에는 이 주제에 대한 전문적인 접근도 가능하도록 각주를 여럿 달았다. 글 꼭지의 주제를 잡으면서도 반구대암각화와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과 논제를 가능한 다 포함시키려 했다. 기후 환경의 변화 및 새김 기법, 바위신앙과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과 관련된 의문과 논쟁을 각각 독립된 글 꼭지로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이 반구대암각화의 연구, 보존과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교양서처럼 보이지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연구서에 가깝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울산대학교 박물관장과 대학기록관장, 미국 U. C. 버클리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 방문교수,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과 전문위원, 한국암각화학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겸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장으로 있다. 암각화를 비롯한 한국 고대의 역사와 미술 그리고 문화를 활발히 연구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문화를 탐구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백상출판문화상 인문과학부문 저작상, 고구려발해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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