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가 된 베토벤 - 뮤지컬 〈루드윅〉과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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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가 된 베토벤 - 뮤지컬 〈루드윅〉과 〈베토벤〉
  •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 승인 2023.04.0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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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연의 ‘뮤지컬 인사이트’

 

뮤지컬에는 전기(傳記)뮤지컬이라는 하위 장르가 있다. 용어에서 짐작되듯 실존 인물을 뮤지컬의 소재로 다루는 장르다. 장르로 구분될 정도로 많은 전기뮤지컬들이 있지만, 아무나 뮤지컬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인물은 극으로 재탄생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워야 한다. 그러나 ‘흥미’는 개인의 취향에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흥미로울 수 있는 인물이 적합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전기뮤지컬로 다수 제작되는 이유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흥행 중인 <MJ>는 마이클 잭슨의 전기뮤지컬이며, <SIX The Musical>은 영국 헨리 8세의 여섯 부인들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한국 뮤지컬 신(scene)은 특히 실존 인물에 민감하다. 조선의 왕에서부터 일제강점기의 인물들, 그리고 동서양의 수많은 예술가와 유명인들이 창작뮤지컬로 재탄생되었다. 얼른 떠오르는 것만 해도 <세종, 1446>의 세종, <경종수정실록>의 경종과 연잉군, <화성에서 꿈꾸다>의 정조, <명성황후>와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명성황후와 고종, <난설>의 허균과 허난설헌, <영웅>의 안중근, <곤 투모로우>의 김옥균, <신흥무관학교>의 이회영, <윤동주, 달을 쏘다>의 윤동주, <사의 찬미>의 김우진과 윤심덕, <라흐헤스트>의 김향안, 김환기, 이상, <명동로망스>의 전혜린, 이중섭, 박인환이 있다.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의 파가니니, <살리에르>의 살리에르, <빈센트 반 고흐>의 고흐, <프리다>의 프리다 칼로, <모딜리아니>의 모딜리아니, <에곤 실레>의 에곤 실레, <니진스키>의 니진스키, <디아길레프>의 디아길레프, <메리 셸리>의 메리 셸리, <브론테>의 브론테 자매들, <실비아, 살다>의 실비아 플라스, <마리  퀴리>의 마리 퀴리가 있다. 지역문화재단의 사업 결과인 경우도 있고 예술가와 인물 시리즈를 대표작으로 만들고자 하는 제작사의 작품인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든 유명한 역사적 인물은 국내 시장에서 뮤지컬의 소재로 적합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시장성이 있다는 것이다. 

 

      [뮤지컬 루드윅] 운명_ 루드윅 역 백인태, 청년 역 조훈_ 제공 과수원뮤지컬컴퍼니, 이준용(스튜디오눈)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그저 나니까_ 루드비히 반 베토벤 역 카이_ 제공 EMK

이번엔 베토벤이다. 2022년 말부터 2023년 상반기 사이에 베토벤을 다룬 2편의 공연이 동시에 올라갔다. 서양의 음악가, 미술가, 무용가, 여류 작가/과학자까지 관심을 넓히고 있는 한국 뮤지컬은 고전주의 음악의 전성기를 이끈 베토벤까지 관심을 확장시켰다. <루드윅>(과수원뮤지컬컴퍼니, 추정화 작/연출, 허수현 작곡, 2022. 12. 20~2023. 3. 12, 예스24스테이지 1관)과 <베토벤>(EMK뮤지컬컴퍼니, 미하일 쿤체 작/작사, 실베스터 르베이 작곡, 길 메머트/왕용범 연출, 2023. 1. 12~3. 26,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 그것이다. 

<루드윅>은 2018년에 초연되어 이번 시즌에 4연을 완료하였고, <베토벤>은 초연이다. 두 공연은 베토벤의 삶에서 공연화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아 서로 다른 테마로 그의 삶을 극화했다. <루드윅>의 테마가 ‘우정과 교육’이라면 <베토벤>은 ‘사랑’이다. 하지만 두 공연 모두 ‘청력을 잃은 예술가의 괴팍한 성미’를 초점화하여 결국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베토벤을 다룬다. 

 

(왼쪽) [뮤지컬 루드윅] 다락방의 피아노_ 루드윅 역 박민성, 발터 역 박이든_ 제공 과수원뮤지컬컴퍼니, 이준용(스튜디오눈); (오른쪽)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너의 운명_ 루드비히 반 베토벤 역 박은태_ 제공 EMK

따라서 <루드윅>과 <베토벤>은 베토벤이 일반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신경질적으로 인상 쓴 얼굴, 고집과 아집이 가득 서린 눈매, 타협하지 않는 정신, 특유의 카리스마가 베토벤(박민성, 박은태)의 재현방식을 이끈다. 그의 정신적 성장을 자극하는 인물이 여성이라는 점도 같다. 

<루드윅>에는 베토벤과 우정을 나누는 마리(이은율)가, <베토벤>에는 사랑을 나누는 안토니(윤공주)가 있다. 마리와 안토니 중 완전히 허구적인 인물은 마리다. 마리는 실존 인물인 베토벤의 조카 카를의 개연성을 높이지만 창조된 인물이고, 안토니는 베토벤의 ‘불멸의 여인’ 후보자 중 1인이다. 하지만 안토니를 ‘불멸의 여인’으로 보는 관점 역시 상대적인 것이므로 베토벤과 안토니의 사랑 이야기에는 필요한 만큼의 허구성과 사실이 결합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뮤지컬 루드윅] 세상을 넘어 꿈을 향해_ 마리 역 이은율, 발터 역 박이든 _제공 과수원뮤지컬컴퍼니, 이준용(스튜디오눈)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어쨌든 사랑_ 제공 EMK

기실 ‘뮤지컬’ <루드윅>과 <베토벤>을 사실과 허구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 실존 인물 베토벤이 뮤지컬로 흡수될 때 관찰되는 어떤 공식이 흥미롭게 읽힌다. 드라마는 베토벤의 괴팍함이 곧 결핍의 이면이라는 관점 아래 정신적 성장과 성숙의 문제를 다룬다. 베토벤에게는 ‘결핍’ 상태를 일깨우는 존재(발터, 카스파)가 있지만 정작 자신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청력이 상실되면서 베토벤에게는 여성과의 만남을 통한 성장의 계기가 주어진다. 그러나 베토벤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채 삶의 깨달음을 얻고 죽는다. 

한편, 음악은 베토벤의 음악을 넘버로 활용하는 방식과 범위에 따라 나뉜다. <루드윅>은 베토벤의 생애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에, 백그라운드 음악(BGM)으로 베토벤의 음악을 활용한다. 하지만 <베토벤>은 베토벤의 ‘주크박스 뮤지컬’이라 명명될 만큼 넘버 자체로 폭넓게 활용한다. 교향곡과 기악곡이 ‘가창곡’으로 변모하여 작품 전체에 포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베토벤>에서 작곡은 베토벤의 음악을 드라마에 맞춰 선택하고 쪼개고 편곡하여 공연에 붙이는 역할로 축소되어 있다.  

 

[뮤지컬 루드윅] 상실_ 루드윅 역 백인태, 청년 역 조훈, 피아니스트 역 조재철_ 제공 과수원뮤지컬컴퍼니, 이준용(스튜디오눈)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용납 못해_ 루드비히 반 베토벤 역 카이_ 제공 EMK

이처럼 두 공연에는 ‘결핍에서 성장으로’라는 공식이 적용되어 있다. 그런데 공연의 결과물을 보면, 이 공식은 다음의 질문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왜 베토벤의 성장에는 반드시 ‘여성’이 계기를 제공해야 하는 것일까? 베토벤이라는 신화적 인물에게는 뮤즈-여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뮤지컬은 이 틀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루드윅>은 마치 이 질문에 응답하듯, 마리에게 다음과 같은 독자적인 서사를 부여해 놓았다.

“마리는 건축가로 성공하고 싶지만 ‘여성’이 ‘남성’의 영역에 관여한다는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건축의 세계에 뛰어들지만 실패한다. 이에 마리는 허위를 벗고 여학생들에게 고등수학을 가르치는 도미니카 수녀가 됨으로써 삶의 평안을 얻는다.” 

 

   [뮤지컬 루드윅] 모두 기억 할 당신의 음악_ 마리 역 유소리_ 제공 과수원뮤지컬컴퍼니, 이준용(스튜디오눈)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상류층_ 제공 EMK

<베토벤>의 안토니는, 나름의 주체성을 가지고 행동하다 삶의 조율점을 찾는 마리와 달리, 베토벤과의 깊은 교감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유부녀’라는 삶의 조건을 뛰어넘지 못한다. 베토벤에게 활력과 영감을 주고 사랑의 감정을 일깨움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삶의 여러 국면들을 폭넓게 이해하도록 돕는 조력자로 존재하다 극 안의 생명을 다한다. 

 

                                         [뮤지컬 베토벤_ Beethoven Secret] 불꽃놀이_제공 EMK

그러나 마리가 안토니에 비해 주체성이 더해졌다고 해서, 캐릭터의 흐름이 매끄러운 것은 아니다. 마리의 첫 등장은 초연 때부터 4연이 완료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억지스럽다. 어느 날 갑자기 베토벤에게 나타나 자신을 가르치던 교수의 아들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마리의 행동에서 어떤 극적인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까? 마리는 결국 실존 인물인 카를과 베토벤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조력자라는 점에서, 안토니의 기능적 측면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뮤지컬 루드윅] 넌 나의 미래_ 루드윅 역 테이, 청년 역 김준영, 마리 역 유소리, 발터 역 김시훈_ 제공 과수원뮤지컬컴퍼니, 이준용(스튜디오눈)

그러므로 베토벤은 뮤지컬로 흡수되면서 일련의 공식을 따른 콘텐츠로 축소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루드윅>이 4연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배우들이 퍼포먼스로 구축한 ‘내적 논리’에 있다.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고 인물의 행동과 정서의 근거를 찾아 연기로 쌓은 공연의 ‘결’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단단해지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곧바로 이어지는 <베토벤> 시즌2 제작 소식은 매우 반갑다. 프로덕션 진행 과정에서 내적 논리가 세워질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배우들이 구축한 세계 너머, 그 이상의 세계가 궁금해지는 (창작)뮤지컬이 보고 싶다. 콘텐츠 이전의 원형 그 자체가 품고 있었던 풍부한 예술적 자극이 살아있는 뮤지컬이랄까. 아마도 뮤지컬의 모든 것은 베토벤과 그 음악에 대한 예술적 경외심에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최승연 뮤지컬평론가

런던대학교(로열 할러웨이)에서 연극학 석사, 고려대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국제한국학센터 연구교수, 워싱턴 대학교(시애틀)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 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 “라이선스 뮤지컬의 현지화에 대한 일고찰”, “확장하는 보편, 타협하는 로컬리티”, “해방 후 오영진의 좌표와 음악극 실험”, “만들어진 비애와 감성의 연대”,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공역),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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