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한 사람이 보상 받아야 한다는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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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한 사람이 보상 받아야 한다는 환상
  • 위대현 이화여대/전국교수노동조합
  • 승인 2023.03.2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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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

올해 초 화두 중 하나는 에너지 요금의 급등이었다. 1월 소비자물가 자료에 따르면 전년 동기 대비 전기 요금과 도시가스 요금이 각각 29.5%, 36.2% 상승했다. 비록 상반기에 에너지 요금을 동결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결국 추가 인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견 당연한 것처럼 포장된 이런 주장은 에너지 소비의 비대칭성을 은근슬쩍 은폐하고 있다. 실로 2021년에 전력다소비 상위 20개사가 8만7794 GWh의 전기를 사용하였다. 2021년 국내 전기사용량은 5334억 kWh, 즉 53만 3400 GWh인데 이 중 무려 16%에 달하는 양을 단지 20개의 회사가 사용한 것이다. 최상위권 기업들의 경우에는 전국에서 모두가 함께 쓴 총량의 1~2%에 달하는 부분을 순전히 자신들의 이윤 창출만을 위해 동원하였다고까지 할 수 있다. 이렇게 국내 에너지 소비 지형은 대자본가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에너지를 독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국내 전력 공급 체계는 그러한 독식을 권장하기까지 한다. 한전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국내 전력다소비 상위 10대 기업이 일반 기업 대비 저렴한 전기료 혜택을 받아 최근 5년간 총 4조2000억 원의 이익을 챙긴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듯 대자본가들은 전기를 많이 쓰면 쓸수록 상대적으로 이득이다. 그 어떤 측면에서도 국내 에너지 소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이렇게 지금껏 누적된 차별을 무시하고 에너지 가격을 일률적으로 올리는 짓은 위기에 대한 책임을 역진적으로 지우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의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도, 여전히 세간에는 일반 소비에 비교해 경제와 산업을 위한 에너지 사용에 특혜를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관념적 경향이 존재한다. 작년 기준 전체 산업용 전기 요금 판매단가는 ㎾h당 105.48원이었지만 삼성전자는 94.83원에 전력을 구매해 작년 한 해만 일반 기업 평균 대비 1960억 원의 할인혜택을 받았는데, 현행 주택용 최저요금인 kWh당 112원과 비교하면 상대적 혜택의 크기는 심지어 더 커진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삼성전자에게 혜택을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하는 게 아니라 편의를 위해 사용되는 주택용 요금이 더 비싼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일하는 것이 곧 선이며, 열심히 한 사람은 보상 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은연중 작동하고 있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 즉 산업(industry)은 선이기에 산업체가 열심히 가동되도록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식의 이른바 ‘상식적 관념’ 말이다. 

그러나 과연 열심히 한 사람이 진정으로 보상을 받아야 할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 질문의 답이 부정임을 알 수 있다. 행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와 그 행위의 긍정적 효과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관계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도둑질도 성공하려면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열심히 한 도둑에게는 벌을 줘야할뿐 상을 줄 필요는 없다. 따라서 ‘상식적 관념’은 상식만으로도 기각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논리는 한층 더 기괴하게 작동하고, 심지어 여기서는 행위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효과는 더욱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순전히 물리적이고 열역학적으로만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게오르게스크-뢰겐(Nicholas Georgescu-Roegen)을 거쳐 알프 호른보리(Alf Hornborg)가 도달한 결론처럼, 가역적이지 않은 모든 경제 활동―그리고 경제 활동에서 가역적인 과정이란 사실상 없다―은 엔트로피의 생성, 즉 에너지와 환경의 질 저하를 수반한다. 이게 열역학 제2법칙의 경제적 함의다. 이 물리적 현상 자체는 역사상 어느 체제에서나 동일하게 사실일 터이지만, 근대 산업자본주의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 과정을 가속하는 강력한 유인책을 제공한다.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그 자본의 양적인 증가만을 노리는 산업자본가는 초기 투자된 화폐보다 더 많은 화폐를 얻는다는 목적 외 다른 어떠한 동기도 가질 수 없다. 상품의 쓸모 자체는 그의 목적이 아니다. 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산업자본가는 그가 연료와 원료에 들인 화폐보다 더 많은 화폐를 대가로 획득하고, 따라서 오늘 산업에서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하면 할수록 내일 더욱더 많은 새로운 자원을 사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곧 더 대규모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매 순환마다 엔트로피는 더 빠르게 생성되고 에너지와 환경의 질은 더 급격히 저하된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유인책을 제공하는 동시에 경쟁이라는 채찍을 통해서 강제적으로 이 과정을 가속한다.

이렇듯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경쟁적인 상품 생산, 화폐와 시장이 함께 결합된 자본주의적 구조 내에서 열심히 하는 것은 선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결핍에 시달리던 시절이라면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과 그리하여 쓸모 있는 사용가치를 획득하는 일이 선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막대한 생산력을 확보한 현대에는 결코 그러할 수 없다. 생산력을 그 양적인 한계까지 상시적으로 쥐어짜는 억압적인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바로 에너지와 기후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에너지와 기후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대응은 자본주의 생산의 저지와 그 관계의 파괴여야만 한다. 자본주의적 구조 내에서 실로 유의미한 행위는 자본주의 생산을 즉각적으로 중지하는 총파업이나 그 생산관계의 조건들을 파괴하는 각종 투쟁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 내에서 순응하며 열심히 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을 유지하고 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뿐이다.

열심히 한 사람이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환상은 에너지 요금 체계뿐만이 아니라 성적순 입시 체계, 소위 ‘공정’ 담론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반영되어 있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공고해지면 질수록 이 이데올로기 역시 더욱 당연한 것인 양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실로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리적이고 열역학적인 실상은 정반대이다.

생산력에 적대적인 생산관계가 철폐될 때에야, 엥겔스의 말을 빌리면 “현재의 질곡으로부터의 생산력 해방”을 달성할 때에야, 근본적 해결이 비로소 가능하다. 그때까지는 현 질서에 저항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자야말로 가장 악질적인 분자다. 도덕률을 전복하여야 한다. 그른 것은 노력과 근로이고 옳은 것은 태업과 파업이다. 근면함이 악이고 게으름이 선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태만(怠慢)하라! 


2023년  3월  20일

전/국/교/수/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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