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첨병은 ‘기술관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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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첨병은 ‘기술관료’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3.02.27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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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주의의 심리학 | 마티아스 데스멧 지음 | 김미정 옮김 | 원더박스 | 312쪽

 

전체주의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로 답할 사람이 있을 테다. 이 책은 지금의 전체주의는 1인 독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21세기형 전체주의가 과학자와 기술 관료가 주도하고 전체 대중이 동의하는 획일적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위기가 닥치면 한쪽에서는 항상 더 큰 권력과 책임을 갖는 큰 정부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온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는 이미 확보한 개인 정보를 활용해 감시와 관찰을 강화하고 사회적 강제 조치를 서슴없이 시행한다. 테러나 기후위기 때마다 나타났던 이런 경향은 팬데믹 상황에서 다시 한번 재현되었다.

20세기 초,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정부 형태가 출현했다. 나치주의와 스탈린주의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정부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저작을 통해 “전체주의 정부는 독재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고 밝혔다. 아렌트는 이 차이점의 본질이 심리적 차원에 놓여 있다고 논했다. 독재는 원시적인 심리 기제를 토대로 삼는다. 즉, 독재 정권의 잔혹한 잠재력을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전체주의는 대중 형성mass formation이라는 음흉한 심리적 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렌트는 이 ‘심리’의 본질과 과정까지 원고를 밀고 나가지 않았지만 이 책의 저자 마티아스 데스멧은 이런 심리적 과정에 좀 더 천착했다. 전체주의 체제의 국민은 집단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맹목적으로 희생한다.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극단적인 비관용을 드러내며, 편집적인 밀고자 심성을 지니고 있어 정부가 개인의 삶 한가운데를 파고들도록 허용한다. 유사 과학을 토대로 한 터무니없는 세뇌와 선전에 이상할 정도로 취약하고, 모든 윤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편협한 논리를 맹목적으로 따른다. 모든 다양성과 창의성을 상실하며, 본질적으로 자기 파괴적이다.

저자는 현재 새로운 (기술관료에 기반한) 종류의 전체주의가 부상하고 있다는 징후가 여럿 보인다고 말한다. 치안 기관이 개인의 삶을 침범하는 경우(메일 확인, IT 시스템 조사, 도청 장치 설치, 전화 도청)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고, 감시 사회가 전반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사생활권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또한 최근 10년 사이에 정부가 조직한 채널을 통해 시민들이 서로를 밀고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었고, 다른 의견을 내는 목소리에 대해,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동안 감시와 억제가 늘어났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대한 지지가 사라졌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이끌고 있는 것은 스탈린, 히틀러 같은 ‘주모자’가 아니다. 바로 ‘따분한’ 기술관료다.

전체주의는 인간 지성이 삶과 사회의 지침 원리가 된다고 여기는 신념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기술관료와 전문가들이 그들의 기술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라는 기계를 결함 없이 운영함으로써 유토피아 같은 인공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체주의 관점 안에서 개인은 집단에 완전히 종속된 채 사회라는 기계 속에 부착된 하나의 부품으로 축소된다. 여기서 모든 의사결정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법과 원칙이 아니라 ‘전문가’의 분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까닭에 전체주의는 항상 법률을 폐기하는 쪽을 택하거나 법률 실행에 실패하고, ‘명령에 따라’ 통치하는 편을 선호한다. 

저자는 전체주의의 부상이 민주주의에서 기술관료제로의 전환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또 하나, 아주 예전부터 내려온 전통인 대중 형성에 주목한다. 전체주의는 소위 민주적이라고 불리는 국가에서도 공공연히 행해진다. ‘대중의 지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반복되는 테러, 지구온난화, 코로나바이러스 등의 공포 대상 앞에 드러나는 점점 더 절박하고 자기-파괴적인 일련의 사회적 반응과 일치한다.

본질상 대중 형성은 개인들의 윤리적 자기 인식을 파괴하고 그들의 비판적 사고력을 앗아가는 일종의 집단 최면이다. 이 과정은 음흉한 속성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이 의심 없이 희생양이 되게 만든다. 대다수 사람은 전체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대중 형성은 현재 진행형이다. 21세기 대중 형성은 세계의 합리화, 기계화의 효과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사회적 원자화 상태에 들어갔고, 이들의 수가 임계치를 넘어서면 대중 형성 과정이 시작된다. 나아가 저자는 대중 형성이 일어나는 네 가지 특징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첫째는 일반화된 외로움, 사회적 고립, 사람들 간의 사회적 유대 부족이다. 사회적 연결성의 퇴락은 무의미한 삶이라는 둘째 조건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 조건은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이유 없는 불안과 심리적 우려다. 앞의 세 조건에 이어 넷째 조건, 즉 상당량의 이유 없는 좌절과 공격성이 생겨난다. 사회적 고립과 성마름 사이에는 논리적 연결고리가 있으며 이는 경험적으로도 입증되었다.

결국 개인이 대중 형성에 참여하는 이유는 본질상 합리적인 경우가 드물다. 전문가들이 멋진 제목을 앞세우고 때때로 공영 텔레비전 방송에 나오면, 마치 주어진 조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여 전략이 더욱 정당화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는 이 정도만 제시해도 대응 조치가 올바르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 고대로부터 논리적 오류로 알려져 온 군중에 호소하는 논증argumentum ad populum과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argumentum ad auctoritatum은 대다수 사람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데 충분하다. 모든 일에서 이야기에 동조하는 근본 동기는 집단 형성과 집단 압박이지, 이야기의 정확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과학도 이렇게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 과학은 소수가 다수에 도전장을 내는 하나의 담론이었으나, 나중에는 과학 자체가 다수의 담론이 되어버렸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과학적 담론은 처음과는 반대되는 목표를 지향하게 되었다. 대중을 조작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경력을 쌓게 하고, 상품을 홍보하고, 기만을 퍼뜨리고, 타인을 얕잡아보고 낙인을 찍게 했다. 실제로 분리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데도 과학적 담론이 작용했다. 요컨대 여느 지배적 담론처럼 과학적 담론도 기회주의, 거짓말, 기만, 조작, 권력을 뒷받침하는 특권적 도구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수천만 명이 바이러스로 인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기술 관료는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대중은 ‘사실이 아닌 걸 말할 리가 없다’고 동조한다. 새로운 단계가 개시될 때마다 우리는 자유를 조금씩 더 잃어버리고, 마지막에 도달하는 최종 목적지에서 인간은 거대한 기술만능주의적 의학 실험 속에서 QR 코드로 축소된다. 저자는 모든 아동이 자기 존재 및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와 관련하여 근본적인 불확실성과 직면하듯이, 과학 및 과학에 기반한 계몽주의 사회도 이제 갈림길에 이르렀고 말한다.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는 불안을 회피하고 불확실성을 부인하든지, 아니면 우리의 자기애적 불안을 뿌리치고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첫 번째 길을 택한다는 것은 더 많은 (유사)과학적 이데올로기, 그릇된 합리성, 그릇된 확실성, 기술적 통제에서 해결책을 찾는다는 뜻이다. 이 길의 끝에는 더 심한 불안, 우울, 사회적 고립이 기다린다. 이런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겠다고 더 고집스럽게 애쓰다 보면 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악순환이 도달하는 논리적 최종점이 대중 형성과 전체주의, 즉 인간의 모든 창의성, 개별성, 다양성, 모든 형태의 사회적 연결(개인과 국가 집단 사이의 유대는 제외)의 급격한 파괴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촌 전체가 대중 형성이라는 동일한 과정에 사로잡혔고, 어디든 존재하는 통제가 사생활의 가장 내밀한 영역까지 다다를 정도로 세계의 ‘기술화’와 ‘기계화’가 확대되었다. 이에 전 세계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궁극적 종점에 이르러 마지막 총력을 다한 뒤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방식으로 무력성을 드러내는 순간, 즉 한 순환의 종결점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길을 택한 사회는 불안을 뿌리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불확실성이 인간의 조건에 내재되어 있으며 창의성, 개별성, 인간적인 연결성을 출현시키는 필요조건임을 깨닫는다. 이 길 위에서 사회는 연결성과 개인의 차이점이 서로를 강화하는 공간이 된다. 이와 반대로 전체주의 체계에서는 집단성이 모든 사람의 개별적 자유를 철저하게 빼앗아 모든 다양성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단일한 국가 정체성이 차지한다. 위대한 과학Great Science은 앞서서 두 번째 길을 걸어갔다. 이성을 절대적 한계까지 추구한 뒤, 그 지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앎, 타자와 연결되는 새로운 연결 방식, 그리고 서로 다른 원리를 토대로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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